['폐암 3기'의 신성일]
"난 혼자서 밥 해먹어… 마누라 꽁무니 따라다니며
얻어먹는 사내놈치고 건강한 놈이 없어"
"여성이 없으면 남자 인생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소
애인은 내게 삶의 활력을… 나는 솔직해지고 싶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이치다. 팔십 노인이 암(癌)에 걸린 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수는 있지만 뉴스가 아니다.
하지만 '신성일 폐암 3기'라는 소식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 최고의 영화배우는 "내 건강지수는 50대 초반이며 지금도 여인을 보면 즐거워진다"라고 내세우며 운동과 식단으로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해왔고 담배를 끊은 지가 35년이고 더욱이 공기 좋은 시골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방송 프로에서는 전공의들을 모아놓고 '신성일의 폐암 발병 미스터리'를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성일 폐암 3기'라는 소식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 최고의 영화배우는 "내 건강지수는 50대 초반이며 지금도 여인을 보면 즐거워진다"라고 내세우며 운동과 식단으로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해왔고 담배를 끊은 지가 35년이고 더욱이 공기 좋은 시골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방송 프로에서는 전공의들을 모아놓고 '신성일의 폐암 발병 미스터리'를 분석하기도 했다.
요즘 그는 매일 15분간 방사선 치료와 일주일마다 항암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비가 슬슬 뿌리던 지난 토요일 오전, 그가 살고 있는 서울 집으로 찾아갔다.
나이는 분명 80세인데 그는 여전히 중년 신사처럼 보였다. 그의 유아독존(唯我獨尊) 스타일도 그대로 살아있었다.
"내가 완전히 힘이 빠져 풀죽은 얘기를 하려는 걸 들으려고 찾아왔나요. 어림없습니다. 나는 내 몸에서 암을 내쫓아버리려고 합니다. 평소보다 더 관리하니까 몸 상태가 더 좋아졌어요."
―종양 크기가 5㎝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자랄 때까지 모르고 뒤늦게 발견했군요.
"내가 건강에 자만했던 건 사실입니다. 3년 동안 정기 검진을 안 받았으니까. 6월 11일 아침에 일어나 기침을 하는데 가래 속에 핏덩이 두 개가 나온 거요. 의료진은 종양이 크고 임파열에 붙어 있어 현재로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방사선과 약물치료로 암 덩이를 축소시켜야 수술이 가능해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천하의 신성일도 많이 겁먹었나요?
"처음엔 생존 가능성을 30%라고 하더군. 그까짓 엑스레이 하나 보고 그런 말을 하니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내가 지금껏 운동할 것을 다 했는데… '사진 한 장 갖고 공갈치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담배도 안 피우는데 왜 폐암입니까?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으니 가족력(家族歷)은 있겠지만, 나는 건강관리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기 좋은 데 살았지. 담당 의사도 이유를 모르니까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고 하대요."
―선생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사람이 어딨습니까? 남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는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쪽은 아닐 텐데요.
"과거에 감옥 갈 때는 스트레스를 좀 받았지만…. 어쨌든 의사들은 원인 불명이면 '스트레스'에 갖다 붙인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에는 향(香) 때문일 것 같아요. 경북 영천의 한옥에 살면서 기도실을 마련했어요. 어머니 영정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7년간 거의 날마다 기도해왔어요."
―그러면 절에 사는 스님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군. 절집은 공간이 터져 있지만 나는 밀폐된 작은 방에서 기도했으니까요."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베토벤 스타일의 장발을 자르고 신문을 정기구독 했다면서요?
"그전에는 영천과 대구를 오가느라 정기구독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매일 병원에 가야 하니 여기서만 지내야 하잖아요. 신문 4종을 봅니다."
집 안 풍경은 세상에 비친 신성일의 이미지와 다르다. 서재에는 책들이 제법 가득했고 거실 탁자 위에도 흩어져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가스레인지에 놓인 냄비 뚜껑을 열어 보이며 "아침에 먹고 남은 거요. 미역과 황태채, 두부를 넣은 된장국이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인 엄앵란 여사는 어디에?
"따로 지내요. 나는 혼자서 잘 해 먹어요. 마누라 꽁무니 따라다니며 얻어먹는 사내놈치고 건강한 놈이 없어. 나는 57세 때부터 독립해 살았어요."
―지금 제 나이인데, 힌두교에서는 나이 오십부터는 가족을 떠나 숲에 들어가 도를 닦는 시기(林棲期·임서기)라고 했지요.
"독립하려면 나처럼 집이 두 채쯤 돼야지. 그런 능력을 갖춰야 그럴 수 있지. 그게 아무나 되는 줄 아시오."
―방송에 나와서 밝힌 애인(愛人)과 같이 사는 것은 아니고요?
"그 친구는 대구에 직장이 있는데 여기 있으면 안 되죠."
―선생은 "나는 늘 여인을 사랑했고 그건 내게 에너지를 줬다"며 자신의 여성 편력이나 애인을 공개한 국내 유일의 유명인사인 셈입니다.
"비난을 감수하면서 솔직하게 말한 거요. 남자들이 말 못할 것을 대신 했지. 대체로 배운 여인들도 내 말에 동의하지요."
―방송에서 그렇게 떠벌릴 사안입니까?
"그건 나와 생각이 다른데. 그게 사실이니까요. 물론 방송에 나와 그렇게 떠들어 손실을 봤어요. 광고가 끊기고 비난과 공격도 받았고…."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부인 엄앵란씨에 대한 배려가 아닌데?
"자기(엄앵란)는 방송에서 '신성일이가 바람피워 고생했다'는 식으로 얘기를 안 했나요. 부부 관계에 대해서는 남들은 알 수 없는 게 있어요. 지금껏 나는 애인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애인은 내게 삶의 활력을 줬어요. 내게는 호적상 부인보다, 사랑을 나누고 취향이 맞고 대화가 되는 애인이 더 소중해요. 지금 함께하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나이에도 여성과의 성적 관계가 중요한가요?
"이런 답답한, 공부를 좀 더 해야겠네. 여성이 없으면 남자의 인생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소."
나이는 분명 80세인데 그는 여전히 중년 신사처럼 보였다. 그의 유아독존(唯我獨尊) 스타일도 그대로 살아있었다.
"내가 완전히 힘이 빠져 풀죽은 얘기를 하려는 걸 들으려고 찾아왔나요. 어림없습니다. 나는 내 몸에서 암을 내쫓아버리려고 합니다. 평소보다 더 관리하니까 몸 상태가 더 좋아졌어요."
―종양 크기가 5㎝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자랄 때까지 모르고 뒤늦게 발견했군요.
"내가 건강에 자만했던 건 사실입니다. 3년 동안 정기 검진을 안 받았으니까. 6월 11일 아침에 일어나 기침을 하는데 가래 속에 핏덩이 두 개가 나온 거요. 의료진은 종양이 크고 임파열에 붙어 있어 현재로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방사선과 약물치료로 암 덩이를 축소시켜야 수술이 가능해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천하의 신성일도 많이 겁먹었나요?
"처음엔 생존 가능성을 30%라고 하더군. 그까짓 엑스레이 하나 보고 그런 말을 하니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내가 지금껏 운동할 것을 다 했는데… '사진 한 장 갖고 공갈치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담배도 안 피우는데 왜 폐암입니까?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으니 가족력(家族歷)은 있겠지만, 나는 건강관리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기 좋은 데 살았지. 담당 의사도 이유를 모르니까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고 하대요."
―선생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사람이 어딨습니까? 남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는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쪽은 아닐 텐데요.
"과거에 감옥 갈 때는 스트레스를 좀 받았지만…. 어쨌든 의사들은 원인 불명이면 '스트레스'에 갖다 붙인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에는 향(香) 때문일 것 같아요. 경북 영천의 한옥에 살면서 기도실을 마련했어요. 어머니 영정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7년간 거의 날마다 기도해왔어요."
―그러면 절에 사는 스님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군. 절집은 공간이 터져 있지만 나는 밀폐된 작은 방에서 기도했으니까요."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베토벤 스타일의 장발을 자르고 신문을 정기구독 했다면서요?
"그전에는 영천과 대구를 오가느라 정기구독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매일 병원에 가야 하니 여기서만 지내야 하잖아요. 신문 4종을 봅니다."
집 안 풍경은 세상에 비친 신성일의 이미지와 다르다. 서재에는 책들이 제법 가득했고 거실 탁자 위에도 흩어져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가스레인지에 놓인 냄비 뚜껑을 열어 보이며 "아침에 먹고 남은 거요. 미역과 황태채, 두부를 넣은 된장국이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인 엄앵란 여사는 어디에?
"따로 지내요. 나는 혼자서 잘 해 먹어요. 마누라 꽁무니 따라다니며 얻어먹는 사내놈치고 건강한 놈이 없어. 나는 57세 때부터 독립해 살았어요."
―지금 제 나이인데, 힌두교에서는 나이 오십부터는 가족을 떠나 숲에 들어가 도를 닦는 시기(林棲期·임서기)라고 했지요.
"독립하려면 나처럼 집이 두 채쯤 돼야지. 그런 능력을 갖춰야 그럴 수 있지. 그게 아무나 되는 줄 아시오."
―방송에 나와서 밝힌 애인(愛人)과 같이 사는 것은 아니고요?
"그 친구는 대구에 직장이 있는데 여기 있으면 안 되죠."
―선생은 "나는 늘 여인을 사랑했고 그건 내게 에너지를 줬다"며 자신의 여성 편력이나 애인을 공개한 국내 유일의 유명인사인 셈입니다.
"비난을 감수하면서 솔직하게 말한 거요. 남자들이 말 못할 것을 대신 했지. 대체로 배운 여인들도 내 말에 동의하지요."
―방송에서 그렇게 떠벌릴 사안입니까?
"그건 나와 생각이 다른데. 그게 사실이니까요. 물론 방송에 나와 그렇게 떠들어 손실을 봤어요. 광고가 끊기고 비난과 공격도 받았고…."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부인 엄앵란씨에 대한 배려가 아닌데?
"자기(엄앵란)는 방송에서 '신성일이가 바람피워 고생했다'는 식으로 얘기를 안 했나요. 부부 관계에 대해서는 남들은 알 수 없는 게 있어요. 지금껏 나는 애인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애인은 내게 삶의 활력을 줬어요. 내게는 호적상 부인보다, 사랑을 나누고 취향이 맞고 대화가 되는 애인이 더 소중해요. 지금 함께하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나이에도 여성과의 성적 관계가 중요한가요?
"이런 답답한, 공부를 좀 더 해야겠네. 여성이 없으면 남자의 인생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소."
―엄앵란 여사는 선생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영원한 부부지. 스스로 각자의 존재감을 인정해주지."
―삶을 뒤돌아보면 후회나 미련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까?
"나는 후회할 일이 없어요. 내가 부족하게 살아온 게 무엇이 있나요."
―아무리 잘 살아왔다 해도 아쉬움은 있는 법이지요.
"나는 평생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했어요. 내 주체성을 갖고 했습니다. 삶에서 후회란 자기 뜻과 다르게 끌려갔을 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해 난 책임을 집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손해를 받아도 감수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자리에서 누릴 때는 언제고, 상황이 불리하면 '내가 어쩌다 보니 그걸 맡게 됐다…'라며 변명합니다. 나는 그런 인간들이 싫어요."
―최고의 영화배우가 정치판에 나가 두 번 낙선했지요. 3수(修)를 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그 뒤에 2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정치에 뛰어든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어요. 그렇게 안 해봤으면 내 마음속에 정치 권력에 대한 선망이 남아 있었을 거요. 막상 해보니 정말 별거 없었소.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출두했을 때 나는 변명하지 않았어요. 사진기자들이 모여들 때 나는 수갑 찬 손을 내보이며 찍으라고 했어요. 잡범처럼 구질구질하게 대우받고 싶지 않았어요. 요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최고의 지위에서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왜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교도소장이 '어디 불편한 것 없느냐?'고 물어요. 내가 '질문이 잘못됐다. 여기는 다 불편하다'라고 말했어요. 이에 소장이 '그러면 필요한 것이 없느냐?'라고 해요. 당시 바깥에서 내게 넣어준 책이 2백 권쯤 됐어요. 교도소장은 감방에 그 책들을 둘 수 있게 3단 선반을 만들어줬어요. 그걸로 행복했으니, 행복이라는 게 멀리 있지 않아요. 감옥에서 책도 많이 읽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견뎠어요. 영하 날씨에도 냉수마찰 했어요. 2년간 헛되게 보내지 않았어요 "
―출감할 때는 소감을 묻자 "공짜밥 잘 먹었다"라고 했는데?
"오래된 쌀이라 밥맛이 참 없었어. 내 평생에 그런 밥을 매일 세 끼씩 공짜로 먹었기에 그렇게 말한 겁니다. 남자로서 그전까지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곳이 교도소였는데, 다녀와 보니 별거 아니었어요."
―이번에 암이 발견되기 전까지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분노·복수 등의 영화가 넘쳐났는데 다들 볼 만큼 봤어요. 내가 구상한 영화는 '행복'이었어요(그는 영화 줄거리를 한참 얘기했다). 이 작품은 성공한다고 봐요. 하지만 내 몸이 이렇게 돼서 1년 뒤로 미뤄 놨어요."
―2007년 3월 본지 주말판 'Why?' 창간호의 커버스토리가 선생의 인터뷰였지요. 당시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였지요. 그때는 다시는 영화를 안 할 것처럼 말했지요.
"나는 영원히 배우지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영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배역이 들어오느냐면 요양소에 들어가거나 재산 문제로 싸우는 등 그런 추레한 배역이 들어와요. 그런 건 할 수가 없어요."
―배역을 가릴 게 있나요. 배역은 배역일 뿐인데.
"그런 역을 신성일이가 왜 해요? 내가 돈이 필요하거나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고 볼 거예요. 그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 신성일을 초라하게 보이게 할 뿐이지요."
―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2017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시상식에 나와 공로상을 받았지요.
"이제 그런 자리에 그만 가려고 합니다. 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내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주인공이 되니까요."
―암에 걸리기 전까지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영화 촬영을 하면서 떨어지는 포탄 파편과 바위에 맞아 죽을 뻔한 적은 있어요. 4년 전 '야관문'을 촬영하면서 자살 장면이 있었는데 실제로 목에 줄을 맸다가 혼절했어요. 하지만 나는 죽는 문제에 사로잡힌 적이 없어요. 죽을 때 죽으면 되는 거지. 지금도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신성일은
'남자 주연(主演)'을 맡은 횟수만 약 510회다. 이는 광복 이후로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전성기 시절 한 해에 65편이나 주연으로 출연한 적 있었다. 1960년대 초 그의 출현으로 한국 영화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 캠퍼스, 뒷골목 건달 이야기 등을 다룬 '청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졌다. 단 18일 만에 만든 '맨발의 청춘'(1964년)은 당시 관객 동원 23만 명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로맨스 빠빠' '안개' '만추'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길소뜸' 등의 대표작이 있다.
"영원한 부부지. 스스로 각자의 존재감을 인정해주지."
―삶을 뒤돌아보면 후회나 미련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까?
"나는 후회할 일이 없어요. 내가 부족하게 살아온 게 무엇이 있나요."
―아무리 잘 살아왔다 해도 아쉬움은 있는 법이지요.
"나는 평생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했어요. 내 주체성을 갖고 했습니다. 삶에서 후회란 자기 뜻과 다르게 끌려갔을 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해 난 책임을 집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손해를 받아도 감수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자리에서 누릴 때는 언제고, 상황이 불리하면 '내가 어쩌다 보니 그걸 맡게 됐다…'라며 변명합니다. 나는 그런 인간들이 싫어요."
―최고의 영화배우가 정치판에 나가 두 번 낙선했지요. 3수(修)를 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그 뒤에 2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정치에 뛰어든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어요. 그렇게 안 해봤으면 내 마음속에 정치 권력에 대한 선망이 남아 있었을 거요. 막상 해보니 정말 별거 없었소.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출두했을 때 나는 변명하지 않았어요. 사진기자들이 모여들 때 나는 수갑 찬 손을 내보이며 찍으라고 했어요. 잡범처럼 구질구질하게 대우받고 싶지 않았어요. 요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최고의 지위에서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왜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교도소장이 '어디 불편한 것 없느냐?'고 물어요. 내가 '질문이 잘못됐다. 여기는 다 불편하다'라고 말했어요. 이에 소장이 '그러면 필요한 것이 없느냐?'라고 해요. 당시 바깥에서 내게 넣어준 책이 2백 권쯤 됐어요. 교도소장은 감방에 그 책들을 둘 수 있게 3단 선반을 만들어줬어요. 그걸로 행복했으니, 행복이라는 게 멀리 있지 않아요. 감옥에서 책도 많이 읽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견뎠어요. 영하 날씨에도 냉수마찰 했어요. 2년간 헛되게 보내지 않았어요 "
―출감할 때는 소감을 묻자 "공짜밥 잘 먹었다"라고 했는데?
"오래된 쌀이라 밥맛이 참 없었어. 내 평생에 그런 밥을 매일 세 끼씩 공짜로 먹었기에 그렇게 말한 겁니다. 남자로서 그전까지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곳이 교도소였는데, 다녀와 보니 별거 아니었어요."
―이번에 암이 발견되기 전까지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분노·복수 등의 영화가 넘쳐났는데 다들 볼 만큼 봤어요. 내가 구상한 영화는 '행복'이었어요(그는 영화 줄거리를 한참 얘기했다). 이 작품은 성공한다고 봐요. 하지만 내 몸이 이렇게 돼서 1년 뒤로 미뤄 놨어요."
―2007년 3월 본지 주말판 'Why?' 창간호의 커버스토리가 선생의 인터뷰였지요. 당시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였지요. 그때는 다시는 영화를 안 할 것처럼 말했지요.
"나는 영원히 배우지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영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배역이 들어오느냐면 요양소에 들어가거나 재산 문제로 싸우는 등 그런 추레한 배역이 들어와요. 그런 건 할 수가 없어요."
―배역을 가릴 게 있나요. 배역은 배역일 뿐인데.
"그런 역을 신성일이가 왜 해요? 내가 돈이 필요하거나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고 볼 거예요. 그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 신성일을 초라하게 보이게 할 뿐이지요."
―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2017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시상식에 나와 공로상을 받았지요.
"이제 그런 자리에 그만 가려고 합니다. 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내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주인공이 되니까요."
―암에 걸리기 전까지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영화 촬영을 하면서 떨어지는 포탄 파편과 바위에 맞아 죽을 뻔한 적은 있어요. 4년 전 '야관문'을 촬영하면서 자살 장면이 있었는데 실제로 목에 줄을 맸다가 혼절했어요. 하지만 나는 죽는 문제에 사로잡힌 적이 없어요. 죽을 때 죽으면 되는 거지. 지금도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신성일은
'남자 주연(主演)'을 맡은 횟수만 약 510회다. 이는 광복 이후로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전성기 시절 한 해에 65편이나 주연으로 출연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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