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780 소재. 1908년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공소 시대 1894년 서울에 거주하던 정락(鄭洛, 요한)이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다가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여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나산면과 금성산(錦城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주민들이 이 한약방을 왕래하면서 양천리에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정락은 약 봉지에 ‘천주경’과 성모경‘을 써 주며 약을 복용할 때마다 외우라 하였고, 그 약을 복용하여 병을 고친 몇 사람이 정락에게서 교리 서적을 얻어 공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양천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이진서(李震緖)가 정락을 만나본 후 친척인 이민숙(李珉淑), 이화서(李化緖)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여 1900년 무안 우적동 사내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李廼秀,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계량(桂良) 공소가 시작되었고, 1903년부터는 목포(현 목포 산정동) 본당의 드예(A. Deshayes, 曺有道) 신부가 왕래하며 전교하였다. 1904년 4월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우적동에 부임한 투르뇌(V. Tourneux) 빅톨 신부는 우적동이 외교인 마을에 위치하여 본당 설립지로는 알맞지 않다고 여겨 계량의 신자들을 나주로 이주시켜 나주읍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계량의 신자들은 이주를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나주읍에는 신자가 전혀 없었으므로 나주읍과 계량에서 각 7km 거리인 노안면 용산리 남산에 성당 부지를 마련하였다. 남산을 본당 설립지로 정한 것은 옥동 · 나리매 · 인용 · 상용 · 탑정리 등 여러 공소와의 거리가 가깝고, 남산을 중심으로 약 450호가 인근 40여 마을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전교에 효과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1906년 8월 남산에 4,545평의 부지를 매입한 투르뇌 신부는 이듬해 6월 사내에서 남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매매 계약이 끝난 후 토지의 전 소유주가 묘를 이장하기 위해 무덤을 팠는데 140여 구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자 그 땅을 명당이라 생각하고 교회와의 계약을 파기하였다. 게다가 부락의 유림들이 남산에 천주교가 정착되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므로 투르뇌 신부는 남산을 포기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 무렵 영광 법성에서 한 부자가 교회를 위해 큰 집을 한 채 희사하여 투르뇌 신부는 법성으로 숙소를 옮기고 본당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희사 받은 집이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다시 계량으로 돌아왔다.
본당 설립과 성장 사내와 법성에 본당을 설립하지 못한 투르뇌 신부는 1908년 계량 공소를 ‘계량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1910년 9월 카닥스(J. Cadars, 姜達淳) 요셉 신부는 3,000평의 성당 부지와 수천 평의 임야를 매입하고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벽돌을 직접 찍어 2층 양옥의 사제관을 신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소집 명령을 받아 1914년 프랑스로 귀국하고 말았다. 1919년 카닥스 신부가 돌아올 때까지 목포 본당의 타케(E. Taquet, 嚴宅基) 에밀 신부가 사목을 맡아보았다.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 재임 중인 1927년 성탄 때 벽돌조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 준공하였다. 1933년 광주 북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고, 1935년 5월 나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키면서 본당 명칭을 ‘계량 본당’에서 ‘노안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1936년 6월에 부임한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는 수천 평의 논밭을 매입하고 학교 건물 두 동을 신축하여 4년제 보통학교인 ‘신성 학술 강습원’을 개설, 지방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4년 이민두(李敏斗) 타대오 신부는 농촌 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유치원을 설립하여 어린이 조기 교육에도 주력하였다.
6 · 25 동란 후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에 힘입어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1957년 십자 모양의 성당을 증축하였고, 1958년 9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양천리 마을 입구에 루르드 성모상을 건립하였다. 또한 1957년 3월 ‘성모 중학원’을 설립하여 1961년 ‘성 골롬반 중학교’로 정식 인가받고, 노안면 유일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 지역 사회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1984년 2월 29일 폐교).
196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공업화로 이농 현상이 촉진되자 한때 4,000여 명을 헤아리던 노안 본당의 신자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교적은 노안 본당에 있었지만 고향을 떠난 수많은 신자들로 1981년 6월 모리세이(Michael Morrissey, 모) 미카엘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노안 본당은 8개월 동안 본당 신부 공석 본당으로 남게 되었다. 1982년 2월, 20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길웅(姜吉雄) 요한 신부는 그 해 부활 축일을 기해 본당 및 공소의 신자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운동회를 개최하여 본당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1984년 3월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4월에는 현애원 공소에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5월에는 폐교된 골롬반 중학교의 건물과 대지를 활용하여 ‘청소년 교육장’을 개장하였다. 교회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이 교육장의 1994년 한 해 동안의 활용 현황을 살펴보면 유치부,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일반부 등 모두 179팀(14,523명)이었고, 그중 54개 천주교 단체(5,274)가 이곳을 이용하였다. 본당 자체 피정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없고 시설이 빈약하여, 활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본당의 인적 · 재정적 형편으로는 교육장의 시설 보완이나 개발이 어려운 형편이다. [출처 : 윤선자,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1995년, 내용 일부 수정]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 광주대교구 나주 노안 성당(등록문화재 제44호)
노안 성당이 위치한 노안면 양천리(老安面 良川里) 계량마을은 마을 입구에 성모상이 서 있어 ‘성모고을’로도 불리는 천주교 교우촌이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 멀리 언덕 위에 붉은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붉은 벽돌과 붉은 색 아스팔트 싱글 지붕 단층 건물로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노안 성당이다.
성당의 붉은색 때문에 생긴 6 · 25 전쟁 관련 일화가 있다. 영광 불갑사에 본부를 두고 있던 빨치산들이 노안 성당을 불 지르려고 계량마을로 들어섰는데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병력들이 먼저와 성당에 불을 질렀구나.’ 생각하고 되돌아갔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 건물 전체가 붉은 노안 성당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빨치산들이 멀리서 성당이 불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제5대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대주교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기고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08년 나주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된 노안 성당은 1927년에 지어진 건물을 토대로 계속해서 증 · 개축되어 왔다. 초대 주임인 카닥스 신부는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 성당을 마련하고 직접 벽돌을 찍어 2층 양옥 사제관 건축을 시작했다. 교세가 급속히 성장하자 1926년 부임한 박재수 신부는 벽돌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해 이듬해 완공했다. 이때 완공된 성당은 ‘일자 강당형(마루형)’ 성당이었다.
일제 강점기(1910~1945년) 성당 건축 양식은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뉘는데, 한옥 지붕에 서양식 벽돌 종탑을 세우거나 외벽을 벽돌로 바꾼 한ㆍ양 절충식이거나 내부 공간의 구분이 없는 일자 형태를 띤 강당형 서양식이다. 1927년 지어진 노안 성당은 강당형 서양식 성당 건축 유형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 손꼽힌다. 이 양식은 공간 내부 기둥을 없애고 천장 높이를 일정하게 하면서 단조로운 형태가 특징이다. 따라서 성당은 십자가가 달린 종탑 등 최소한의 형태만 갖추고 일체의 장식을 자제한 채 건물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당하며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시대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현재의 라틴 십자형 성당은 1957년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제단을 중심으로 좌우 소매채를 증축하면서 변경된 것이다. 이는 건물 양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공간 분할이 없던 일자형에서 공간이 나뉜 십자형으로 바뀌었고, 종탑뿐이던 외관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아치무늬가 더해졌다. 특히 종탑부, 창틀, 성당 출입문 등 모두 각기 다른 아치무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 재료도 자연석과 화강석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성당 내부는 강당 모양으로 트여 있으며 마룻바닥이다. 벽면은 같은 형태의 창을 규칙적으로 두어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해소해 주고 있다. 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참행복 선언’(마태 5장)을 주제로 1985년에 제작 · 설치된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마당에는 성모 동굴과 특이한 모습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각상이 있고, 아름드리 사철나무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강당형 서양식 건축 양식에 충실했던 성당이 시대적 · 지역적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안 성당은 나주 지역 및 광주대교구 복음화의 모태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시대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 양식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9월 13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노안 성당은 화려하기보다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 지역적 여건에 따라 최소 공간에 최대 기능을 부여하며 변화를 거듭해온 교회 건축물이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노안 성당은 2008년 11월 19일 감사미사와 기념식을 갖고, 나주 지역 복음화의 산실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당 보수 작업 등을 진행했다. 2009년 10월 10일에는 성 골롬반 중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골사모’(골롬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성당 입구에 봉헌한 성가정상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11년 4월 25일 성당 옆에 은퇴 주교를 위한 새 주교관인 ‘베타니아의 집’을 지어 봉헌했다. [출처 :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