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조선교구장 주교 발자취 좇아 중국을 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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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입국 길에 오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19일 중국 내몽골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사진은 마가자 성당 성직자 묘지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과 묘비. 그의 유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이장돼 서울 용산성직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
전례력에 따라 2017년 새해가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부터 50회에 걸쳐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를 연재한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 추진을 앞두고 그 삶의 궤적을 더듬어 목숨과 맞바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선교 열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또 초기 신앙 선조들이 우리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보편 교회 안에서 위대한 유산으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한 인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평가하고자 한다.
아울러 보편 교회, 특히 아시아 교회 안에서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요청받고 있는 한국 교회의 토대가 우리 신앙 선조들과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예언자적 복음의 증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라’는 선교 사명으로 평생을 살았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을 밝혀 종교적 사목적 세속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선교 열정을 재점화할 동기를 불어넣고자 한다.
기자는 연재를 위해 지난 9월 19일부터 보름간 브뤼기에르 주교가 쓴 「여행기」를 들고 중국 현지를 탐사했다. 복건성 복안(福安)에서 출발한 탐사 여정은 절강성 항주(杭州)와 소주(蘇州), 하북성 헌현(), 산서성 기현(祁縣), 안문관(雁門關), 대동(大同), 하북성 고가영(高家), 서만자(西子), 내몽고 마가자(馬架子)에 이르기까지 4500여 ㎞에 달하는 거리였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산골 마을과 시골 농촌에서 성당 찾기가 녹록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끼리 라디오 송수신기로 물어물어 성당 가는 길을 찾는가 하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아예 동네 주민을 차에 태워 길 안내를 받기도 했다. 태풍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돼 2층 침대 버스를 타고 폭풍우를 뚫고 밤길을 달려 목적지까지 가기도 했다. 고속도로와 국도에선 산사태를 몇 차례나 만났다. 노련한 택시 기사 덕분에 물에 잠긴 도시에서 고립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중국 사정에 밝은 성 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의 헌신적 안내 덕분에 차질없이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지를 찾아가도 역사와 그 장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본당 사제도, 토박이 신자들도 성당 역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교구청을 찾아가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파괴되고 지워진 교회 역사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당들도 대부분 최근에 새로 지어져 그나마 남아 있을 법한 교회 건축물의 자취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중국 현지보다 오히려 국내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행기」에서 자신이 머물던 장소를 단 한 차례도 명확히 표기하지 않았다. 복안 신학교, 복안 주교관, 산서 주교관, 서만자 등으로 표기할 뿐 구체적인 위치와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도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 활동 중인 선교사들이 자신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파리외방전교회와 성 도미니코회,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문서를 통해 중국 선교사들의 활동지를 밝혀낸 연구자가 있다. 바로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이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학회지에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입국로를 밝히는 연구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이번 탐사 취재도 이 논문들에 기초했다. 앞으로 연재할 내용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과 함께 조 교수의 논문들을 원자료로 삼아 풀어나갈 것이다. 아울러 앵베르ㆍ페레올 주교의 서한과 고(故) 최석우 몬시뇰의 박사 학위 논문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서양자 수녀의 「중국 천주교 순교사」 등을 참고 자료로 할 것임을 알린다. 신문 지면 관계상 하나하나 인용 출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재 본문에서는 포르투갈 보호권 아래에 있는 중국 ‘교구’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관할하에 있는 ‘대목구’를 구분해 표기한다. 그래서 기사 본문에서는 ‘조선 대목구’로 표기함을 밝힌다. 또 한국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중국의 인명, 지명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적고 발음하기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발음대로 정확하지 않게 표기되는 게 상당히 많고, 한국 교회 신자들과 교회 내 학술 논문 대부분이 중국 지명과 인명을 한자음 그대로를 표기하고 있어 현행 외국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교회 안에서 통상 사용하는 말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복안(福安)을 ‘푸안’, 서만자(西子)를 ‘시완쯔’라 하지 않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음 그대로 쓸 예정이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반드시 조명돼야 하고 재평가돼야 할 인물이다. 그는 조선 교회를 중국 북경에 속한 신앙 공동체가 아닌 보편 교회 안에서 하나의 지역 교회로 독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교사다. 또 그는 교황청이 중국에서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제한하고 선교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길을 튼 인물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새 선교지에 맞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제시한 예언자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첫 목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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