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얻기 위해 끊임없이 교황청의 문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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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베아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천주교의 조선 전래와 그 발전상을 알리는 1790년 10월 6일 자 서한 |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조선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직자 한 명 없는 조선에 대목구를 설정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파격적 조치에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꾸준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원(自願)이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연이어 요청한 조선 신자들의 헌신적 희생이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1784년 1월 말 북경 북당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을 비롯한 정약전·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줬다. 조선에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그러자 당시 북경교구장 알렉산더 드 구베아 주교(1751~1808)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조선 관할권을 북경교구에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북경에는 교황청과 포르투갈 보호권 소속, 프랑스 라자로회 등 세 선교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관할권을 자신들이 아닌 다른 선교단에 위임할 경우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북경교구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고 포교성성 장관에게 경고했다.
이에 비오 6세 교황(재위 1775~1799)은 1792년 조선 관할권을 북경교구가 아닌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맡겼다. 하지만 북경 현지에선 조선의 관할권이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구베아 주교가 죽은 후에도 후임자인 수자 사라이바 주교(1744~1818)와 피레스 피레이라 주교(1763~1838)는 조선 관할권을 여전히 행사했다. 포르투갈 보호권 하에 있던 북경교구장 주교들은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에도 관할권 문제로 파리외방전교회와 대립하게 된다.
박해 후 교회 재건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친다. 권기인(요한)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1811년 비오 7세 교황(재위 1800~1823)과 북경교구장에게 사제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각각 보낸다.
“저희에게는 오직 지극히 크신 천주의 자비와 성하의 크신 동정밖에는 바랄 것이 없게 되었사오니, 지체 없이 저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 저희는 성세와 고백의 은혜를 받을 길이 없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미사성제에 참여하지 못하나이다. 저희의 원은 크옵지마는 언제쯤이나 그것이 충족되겠나이까? 저희의 눈물과 탄식과 고뇌는 하찮은 것이오나, 성하의 자비는 끝이 없고 한이 없는 줄로 생각하오며, 따라서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선교사를 보내사, 구세주 예수의 은혜와 공로가 전파되고, 저희의 영혼이 도움과 구원을 받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항상 찬양되게 하실 줄로 생각하나이다.”(1811년 음력 10월 24일 교황에게 보낸 조선 신자 편지)
비오 7세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퐁텐블로 성에 감금돼 있다가 1814년 로마로 겨우 귀환해 조선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조선 신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다시 시도한다. 이번엔 정하상(바오로)이 주도했다. 그는 1816년 이후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가 있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따라가 북경교구 선교사를 만나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가 1818년 1월 사망하고, 중국 일대에 박해가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북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마카오에 머물게 되면서 별다른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정하상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하던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은 1824년 북경에서 교황께 직접 편지를 썼다.
“어떤 사람이 여러 날 동안을 먹지 않고 지내면 기력을 다해 죽게 되나이다. 그 사람이 1개월 안으로는 양식을 얻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심한 허기증을 풀어줄 얼마간의 양식이 당장 오지 않는다면 나중에 오게 될 양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한편, 그 사람이 다음 달에 식량을 받게 되어 있지 않다면 그가 오늘 먹을 음식이 무익하지 않겠나이까? 이와 마찬가지로 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주고 장래에 있어 저희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해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이옵니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맡기려 했으나
한문으로 작성된 이 편지는 마카오 포교성성 경리부로 보내져 1826년 12월 3일 자로 라틴어로 번역, 1827년 포교성성에 도착한다. 편지를 접수한 포교성성은 조선 선교를 맡을 선교회를 본격적으로 물색하기 시작했다. 먼저 예수회에 의사를 물었다. 예수회가 거절하자 포교성성은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눈을 돌렸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르와 신부는 △선교지 운영 기금이 없다 △선교사가 부족하다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 선교지를 맡기 어렵다고 했다.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초기 선교 자금을 부담하고, 조선 신자들이 보낸 입국로 자료를 제시하는 등 재협상을 시도했으나 파리외방전교회는 부정적 견해를 고수했다.
이때 태국 샴(현재 방콕)대목구 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6월 20일과 1830년 1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는 편지를 포교성성에 보낸다. 이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그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조선대목구를 설정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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