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 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다. 비록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를 열 성상(星霜).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846년 9월 16일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대건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년)는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 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순교자 옆에 묻어달란 주교의 유언대로 김대건 신부 옆자리에 그를 안장했다.
그 무렵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하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선종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5월 20일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본당신자들과 함께 1906년 여름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초 자연석으로 건립하여 성 요셉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해에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학교 건물을 건립하여 해성학원을 열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신자 자녀들에 대한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1976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고, 같은 해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면서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정착하고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을 순차적으로 완공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장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들이 설치되어 박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03위 시성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발 뼈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경당 앞마당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선종할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최문식 신부는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냈다. 경당 밖 왼편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미리내 성 요셉 성당 위 광장 중앙의 대형 십자가 왼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다. 여기에는 피땀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와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 상단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사적비가 있다. 1976년 순교자 현양사업을 진행하며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17위를 이곳에 이장해 모셨다. 그 중에서 6월 24일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대구대교구로 이장해 이듬해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1988년 9월 20일 미리내에 천묘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나머지 16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 중에서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는 2013년 10월 22일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손골 성지로 이장해 현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묻혀있는 12위는 모두 용인 내사면 대대4리의 목 없는 순교자 줄무덤에서 이장한 유해이다.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되었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의지를 밝혔다. 2015년 4월 7일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23m x 5.5m, 최영철 바오로 작)을 제작 설치하고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2월 2일)]
미리내 성지의 진토
경기도 지역에서 유명한 교우촌으로는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가 있다. 그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은이 공소에서 큰 산을 넘으면 닿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년 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요한) 성인과 다른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루술라도 이곳에 묻혔다. 또 1853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한 뒤 교회에서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곁에 그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 성지 입구 왼편에는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1975년 10월 6일에 창립된 성모 성심 수녀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103위 성인 중에서 두 분의 유해가 있던 곳인 만큼 기념 성당이 건립될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가장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 입구 오른쪽 위에 있는 이윤일 성인의 무덤 자리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그리고 작고 초라하지만 선조들의 신앙이 담겨 있는 미리내 성당을 둘러보지 않고 되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루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보낸 1846년의 옥중 서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