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1]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60년대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보면 후반 (1965-69년)의 연평균성장률은 11.8%로서 1960년대전반 (1960-64년)의 실질성장률은 5.5%의 두배를 넘는다. 한국경제의 기적은 1960년대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답습한 것이었는데, 기간산업의 수입대체와 1차산품의 수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발전전략은 인플레이션과 외환부족으로 곧 위기에 부딪쳤고, 한국경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개입에 기초한 한일국교 재개와 베트남 특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도약단계로 들어갔다.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시장주의적 해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수입대체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이른바 AID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한 이른바 가격의 왜곡의 정정 측면을 중시한다. 즉 1964-66년에 걸친 평가절하, 수출지원제도, 수입자유화 등의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에 의해서 국내가격이 상대적으로 왜곡되지 않게 되었으며, 수출 유인이 수입 유인과 동일해졌다는 의미에서 중립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반면 기존의 국가주의적 해석은 초기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을 통한 발전전략의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국가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의 발전전략의 결함이, 시장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이른바 가격의 왜곡을 정정하는 평가절하와 같은 시장개혁을 통해 극복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고도성장의 시동은 영구군비경제의 효과(=베트남 특수)에서 주어졌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5년 2월 의료반 등 비전투부대 파병으로 시작되어, 그 수는 연간 약 5만명이었으며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 31만여명에 달했다. 한국과 미국은 1966년 이동원 외무장관과 브라운 미국대사 간에 각서를 교환하는 것에 의해,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조건에 관한 수개월에 걸친 교섭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명한 ‘브라운 각서가 그것이다.
’브라운 각서‘에 따라 한국은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군사원조 이외에,
(1) 주월 병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원‘화로 한국 측 예산에 방출하고
(2) 주한미군용 물자의 상당분을 한국에서 조달하며,
(3) 주월한국군 소요 물자와 베트남군 소요물자 중 일정 품목도 한국에서 구매하며,
(4)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 건설업체에게 응찰자격을 부여하는 것 등,
대한(對韓)구매 조치를 크게 확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에 대해 베트남은 전장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시장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수반된 군사비의 확대는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발생시키고 한국경제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외환보유고의 증대, 이것을 계기로 한 급속한 공업화가 그것이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병군인의 송금, 미군의 물자 조달 등을 중심으로 연간 2억달러의 특수를 확보했으며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 2,200만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한국에서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물자조달 내지 상품수출보다도 오히려 무역외수입이었다.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총액은 물품 군납의 증가에 힘입어 매년 증가 경향을 보였다. 즉 1965년 1,770만달러로부터 1970년 7,000만달러로 증가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미국, 일본에 이어 제3위의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한국 수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베트남의 수출비중은 1965년 10.1%, 1966년 9.5%, 1967년 7.2%, 1968년 8.3%, 1969년 7.6%, 1970년 8.4%였으며 연평균 8.5%였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를 분야별로 보면 ;
(1)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3억 6770만달러 (특수총액의 36.0%),
(2) 건설 용역의 군납이 2억 8650만달러 (28.0%),
(3) 수출 (물품 군납 포함)이 2억 8310만달러 (27.7%),
(4) 기타 8,470만달러 (8.3%)로 이루어져 있다.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전체의 36%를 점하여 가장 많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에 대해 온갖 잔학한 살륙이 자행되었던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개척시대와 같은 개척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투수당은 미군의 1/6, 필리핀군, 태국군의 1/5에 불과했고 한국군의 대부분을 점한 병사 즉 상병, 일병, 이병 등의 경우는 같은 계급 베트남군 병사의 급료보다 낮고 참전 각국 장병 중에서 최저액이었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견자의 송금, 미군의 물자조달 등을 중심으로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달러의 특수를 입수했다. 이러한 베트남 특수는 매년 증대하여 특수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5년 0.6%에 불과했지만, 1967년 3.5%, 1968년 3.2%, 1969년 3.0%에 달했고, 한국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베트남 특수가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과 거의 대등했다. (한국특수는 당시 일본의 GNP의 3.8%에 달했다.) 베트남 특수가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경제에 베트남 특수가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보다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65년부터 1972년 8년간 10억2200만달러에 달해 같은 기간 일본으로부터 외자도입총액 10억 8900만달러와 거의 같은 규모의 금액이었다.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재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자금부족과 심각한 외화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던 한국경제에 대해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61년말 외환보유고는 2억 500만달러였는데, 1964년말에는 1억 2900만달러로 계속 감소해서 1964년말에는 외환위기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특수의 증가에 의해 1965년말에는 1억 3800만달러로 증가하고 1966년에는 2억3600만달러, 1968년에는 3억 8800만달러, 1970년에는 5억 84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상품수출보다 무역외수입에 의한 것이며 특수 총액 10억 2200만달러 중 7억 4000만달러가 무역외수입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 베트남 특수는 무역외수입의 증가를 결과시켰으며 무역외수입의 증가는 다시 외환보유고 증가의 요인으로 되어 수입능력을 대폭 증대시켰다. 한국경제는 1960년대 들어 미국원조의 감소에 따라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거액의 베트남 특수의 유입은 외환보유고 확충에 기여하고 19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시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 총액 즉 청구권자금 (무상, 유상원조), 상업차관, 직접투자가 총계 10억 8900만달러였던 것에 대해 같은 기간 베트남 특수의 누계액은 10억 2200만달러로 그것에 필적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가장 걸출한 성과는 다름 아닌 수출의 급증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확대와 함께 수출은 눈부시게 증대하여 1964년에는 1억 2000만달러였던 것이 1972년에는 16억 2400만달러로 13.5배 증대했다. 이러한 높은 증가율은 한국정부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면서 실현되었다.
즉 한국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하면 같은 기간중 수출의 증가율은 연평균 17%로 1971년의 수출목표는 1965년 수출실적액의 3배에 해당되는 5억 5000만달러로 책정되었지만 실제 동기간 중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35.4%로 계획의 2배의 증가율을 기록하여 그 결과 1971년 수출실적은 10억 7000만달러로 정부의 목표액을 2배를 넘었다. 한국경제 발전모형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들어지는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은 베트남 전쟁 없이는 시작될 수 없었다.
한국의 수출시장을 무역통계로 보면 한국의 수출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1년 47.4%, 1962년 42.%로 1960년대 초반 40%대였지만, 1965년 이후는 20%대로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2년 21.9%, 1963년 28.0%, 1963년 28.0%, 1964년 29.5%로 1960년대 초반 20%대였지만, 1965년 이후 매년 증가하여 1968년 및 1969년에는 각각 51.7%, 50.1%로 한국수출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 수출되는 것으로 되었다. 즉 1960년대 초반 일본시장의존에서 1965년 이후는 미국시장의존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대미수출의 급속한 증대는 의류, 합판, 전자제품 등 공업제품의 수출증가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이 수출이 급증했던 1960년대 후반 시기는 바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확전시킨 시기였다. 미국의 연간 250억달러를 넘는 베트남 관계 군사지출이 급속한 군사수요의 확대를 낳았고, 이것이 한국에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것이다. 즉 미국의 수입상황을 보면 베트남전의 확대와 함께 급속하게 신장했다.
1957-64년 8년간 5.6%였던 연평균수입증가율이 베트남전의 확대 이후 1965-72년 8년간 14.8%라는 높은 수준에 달했다. 그 결과 수입액은 1964년 187억달러에서 1972년 556억달러로 약 3배 증가했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특히 현저해서 1965-72년 연평균 47.5%라는 경이적인 증가율을 보여서 1964년 겨우 3560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72년에는 7억6000만달러로 21배 증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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