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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 풀린 官街… 11시30분에 점심 먹고 낮잠

Marine Kim 2016. 12. 23. 13:32

나사 풀린 官街… 11시30분에 점심 먹고 낮잠

일부 공무원들, 국회 발신 번호 뜨면 안 받고 뭉개기도
탄핵 가결 뒤 공직자 기강 해이… 장관들도 눈치보며 人事 주저
"야근 줄고 분위기도 붕 떠 있어"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안 등 주요 정책 발표도 계속 늦어져
좋은 아이디어 있어도 다음 정부에 낸다며 감춰
"나라 어수선, 일할 맛 안난다"며 국조실 암행 감찰에 반발하기도

22일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있는 정부세종청사 6동. 낮 12시부터가 점심시간인데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공무원 수십 명이 쏟아져 나와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일찌감치 점심을 해결한 공무원들은 12시쯤 청사로 돌아와 낮잠을 즐겼다. 경제 부처의 한 과장은 "보통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가면 11시 40~50분쯤 나가곤 했지만 요즘은 느슨해져서 11시 30분에도 나간다"고 했다. 또 일부 공무원은 느긋하게 점심을 즐긴 후 오후 1시 40분이 되어서야 청사로 복귀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 이후 정부 관료 조직의 기강 해이가 심각해지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끄는 '임시 정부'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러도 4~5개월 뒤에야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는 전망에 따라 일선 공무원들은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무사안일한 근무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전국 도처에서 창궐하고 있는 AI(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응이 너무 늦고, 사드 배치 결정에 따른 한·중 관계 경색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해도 해당 부처에서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점이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무역투자진흥회의가 무기한 연기된 것을 비롯해 주요 정책 추진도 지체되고 있다. 세종청사의 한 국장급 관료는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야근하는 사람이 확실히 줄었다"며 "연말 분위기까지 겹쳐 정부가 붕 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야당의 견제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인사권 행사에 제약을 받고 있어 채찍을 가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각 부처 장관들도 안팎의 눈치를 보며 인사권 행사를 주저하면서 공무원들의 근무 기강 해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다들 좋은 정책 아이디어는 숨겨두고 차기 정부에서 써먹으려 한다"며 "장관들도 임기가 몇 달 안 남았다고 생각해서 아랫사람들을 엄하게 단도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긴 정부는 이날 이석준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중앙 행정기관 44곳 감사관 회의를 열어 공직 기강 다잡기에 나섰다.

점심시간 끝난 지 훨씬 뒤에 사무실로 22일 오후 1시 40분 정부세종청사.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대에 느긋하게 점심을 즐긴 공무원들이 커피잔을 들고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들어선 이후, 공직 사회의 기강 해이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점심시간 끝난 지 훨씬 뒤에 사무실로 - 22일 오후 1시 40분 정부세종청사.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대에 느긋하게 점심을 즐긴 공무원들이 커피잔을 들고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들어선 이후, 공직 사회의 기강 해이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현종 기자

"요즘 정부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운전에 비유해보면 겨우 차선 변경이나 할 뿐 좌회전이나 우회전은 전혀 못 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죠. 자동차가 그렇게 가다가는 사고 납니다."

22일 경제 부처의 한 국장급 간부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부 리더십이 사실상 공백 상태가 되면서 국정이 표류하고 있다는 뜻이다. 탄핵 정국이 이어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할 가능성이 커지자, 요즘 관가(官街)는 "나사가 완전히 풀렸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기강 해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승진 회피하고 국회 전화 안 받아

무역투자진흥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해 갖가지 경기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하지만 탄핵 정국으로 흘러가면서 원래 11월 열린 예정이던 11차 회의는 언제 개최될지, 누가 주재할지 모두 오리무중이다. 그러자 회의에 올릴 안건을 만들어둔 각 부처 실무자들이 "(준비한 정책을) 다음 정부에서 추진하면 안 되겠느냐"며 발을 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무 태만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에서 걸었다는 표시인 '02―784―XXXX' 번호의 전화를 공무원들이 좀처럼 받지 않는다는 성토가 나오고 있다"며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휴대전화로 걸었더니 그제야 담당자가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국회 연락을 받으면 자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다며 회피한다는 것이다. 7년 차인 중앙부처의 30대 사무관은 "요즘은 저녁에 메신저에 로그인한 동료가 많이 줄었다"며 "나라가 어수선하니까 일할 맛도 안 나고 동기 부여도 안 된다"고 했다.

관료라면 늘 승진을 꿈꾸지만 요즘은 예외다. 최순실 게이트로 간부들이 무더기로 사직한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1급 간부가 넷이나 공석(空席)이다. 하지만 국장급들이 승진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 색채가 강해져 다음 정부에서 자리 보전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승진이 물 건너간 것으로 판단한 일부 고위 관료는 후배들 인심을 사려고 조직이 느슨해지는 것을 용인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 후 공공 기관이나 민간에 재취업하기를 염두에 두고 좋은 인상을 남기느라 아랫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 내버려둔다는 얘기다. 하도 업무가 굴러가지 않자 기재부 등 일부 부처 내부 통신망에는 "하위직 인사라도 해달라"며 호소하는 글이 올라올 정도다. 이미 상당수 공무원은 차기 정부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경제 부처의 한 관계자는 "정부 조직 개편이 이뤄져 기획예산처가 부활하는 등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요즘 공무원들의 관심 사항"이라며 "혼란의 시대에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식물 정부' 피해는 국민 몫

사실상 '식물 정부' 상태는 탄핵안에 대한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몇 달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피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12월 들어 학령기 독감 의심 환자가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은 보건 당국의 늑장 대응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7~18세 독감 의심 환자 비율은 11월 셋째 주에 이미 외래 환자 1000명당 9.8명으로 유행 기준(8.9명)을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보건 당국은 이달 8일에야 독감 주의보를 내렸다. 주요 정책 발표도 계속 늦어지고 있다. 연내 발표하기로 했던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안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준비가 1년 이상 필요한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은 발표 예정 시기가 내년 여름이지만 산업통상자원부는 아직 시동도 걸지 못하고 있다.

보다 못한 국무조정실은 22일 44개 행정기관 감사관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이석준 국무조정실장은 "불확실한 국정 상황을 틈탄 공직자의 복무 위반, 복지 부동 행태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며 기강 잡기에 나섰다. 국무조정실은 연말연시 암행 감찰 활동 등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군기 잡기'에 반발하는 기류도 약하지 않다. 정부 부처의 한 감사관은 "명백한 비리·비위는 단속해야겠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기존 국정 과제를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은 현실적으로 업무 과실이라고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3/20161223003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