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 Church Story

조선을 갈망했지만 ‘선교의 황무지’ 샴(태국)으로 발령 받아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9) 새 선교 임지가 정해지다

Marine Kim 2017. 3. 27. 23:09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9) 새 선교 임지가 정해지다
조선을 갈망했지만 ‘선교의 황무지’ 샴(태국)으로 발령 받아
2017. 03. 26발행 [14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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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갈망했지만 ‘선교의 황무지’ 샴(태국)으로 발령 받아

▲ 브뤼기에르 신부의 첫 선교지는 베트남 코친차이나대목구였으나 마카오에 도착한 후 선교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샴대목구로 임지가 바뀌었다. 그림은 코친차이나 관헌에 잡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소장


▲ 브뤼기에르 신부의 첫 선교지는 베트남 코친차이나대목구였으나 마카오에 도착한 후 선교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샴대목구로 임지가 바뀌었다. 그림은 코친차이나 관헌에 잡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소장

▲ 브뤼기에르 주교는 샴대목구청이 있는 방콕으로 가기 전에 교구 관할로 있는 말레이시아 페낭의 파리외방전교회 국제 신학교를 들렀다. 사진은 19세기 중후반 페낭 항구 모습.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2월 5일 파리를 떠나 긴 여정 끝에 그해 12월 초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에는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교구뿐 아니라 교황청 포교성성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도 있었다. 사도좌의 선교사로서 포교성성대표부를 방문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라틴어로 번역된 한 통의 편지를 받아 읽었다.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성직자를 요청하는 탄원서였다. 그는 이 탄원서를 읽고 조선 선교를 갈망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다”(1826년 말~1827년 초 바타비아에서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새 선교 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그에게 샴(지금의 태국)으로 떠날 것을 명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를 떠날 때 코친차이나(Cochinchine) 선교사로 내정돼 있었다. 코친차이나는 사이공(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 지역을 가리킨다. 1659년 9월 9일에 코친차이나대목구가 설정됐다. 초대 대목구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 중의 한 명인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Pierre Lambert de la Motte) 주교였다. 코친차이나 대목구는 1844년 3월 11일 동부와 서부 코친차이나대목구로 분할됐다. 1850년 8월 27일에는 동부 코친차이나대목구에서 북부 코친차이나대목구가 신설됐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서 파견될 때 장상으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신부의 경우처럼 마카오에 도착한 다음 극동대표부가 배정한 새 선교지로 가는 게 다반사였다. 또, 모방 신부처럼 선교지에 도착한 후 자원해 새 임지를 바꾸는 일도 적지 않았다. 마카오는 이상을 꿈꾸던 프랑스와 달리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야전 사령부였다. 선교사들은 마카오에 도착했지만 박해 때문에 배속지로 갈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극동대표부의 조치에 따라 순교한 선교사들의 빈자리로 긴급하게 떠나야 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도 동료 선교사인 페코 신부가 갑작스레 선종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샴으로 가게 된 것이다.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파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했다. 오늘날 태국은 물론 말레이반도와 그 북쪽 모든 지역이 해당한다. 이렇게 광활한 교구를 64세의 노쇠한 프랑스인 주교 1명과 본토인 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본토인 사제들도 사목 경험이 부족해 유럽인 선교사에게 지도를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샴교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던 선교지였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이 지역을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황무지로 여겼다.

소조폴리스의 명의 주교로 샴대목구장이며 이 지역의 유일한 유럽인 선교사는 바로 마리 에스프리 플로랑(Marie 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였다. 그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처럼 프랑스 아비뇽교구 출신이었다. 더욱이 그의 고향도 페레올 주교와 같은 보클뤼즈현이었다. 아비뇽 교구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도 있다. 바로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알렉상드로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다. 그는 베트남을 최초로 선교한 예수회 사제로, 교황청에 아시아 선교를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다. 교황청이 아시아 선교 정책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교황이 직할하는 ‘대목구’를 설정하고, 교황을 대리하는 명의 주교 대목구장에게 자치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또 현지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본토인 사제를 먼저 양성해야 한다고 청했다.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 교황은 이 방안을 받아들여 1658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지역에 대목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북베트남과 라오스 일대 지역인 통킹과 코친차이나에 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프랑수아 팔뤼 주교와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를 임명했다. 이들 두 주교는 선교지로 떠나기에 앞서 후속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파리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학교가 파리외방전교회로 발전했다.


▲ 초대 통킹대목구장 프랑수아 팔뤼 주교.

▲ 초대 코친차이나대목구장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



브뤼기에르 신부는 선교지가 확정되자 샴대목구장이 있는 방콕으로 서둘러 떠났다. 플로랑 주교를 도와줄 보좌 주교도 없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선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긴 항해의 여독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다시 배를 타고 1826년 12월 11일 마카오를 떠났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로 왔던 항로를 거슬러 말라카 해협을 지나 페낭 섬으로 갔다. 샴대목구 관할인 페낭을 거쳐 육로로 말레이반도를 통과해 방콕까지 갈 계획이었다. 시간을 단축하고 말레이반도 내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때의 여행기를 작성해 친구인 프랑스 남부 에르교구 총대리 부스케 신부에게 보냈고 그 내용은 리옹에서 발간하는 선교잡지 「전교후원회 연보」 1831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이 여행기는 프랑스와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지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잡지에 실렸고, 1854년 샴대목구장인 장 바티스트 팔구 주교가 2권의 샴 연구서를 발간하기 전까지 샴왕국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소개서로 읽혔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