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재즈시대를 풍미했던 알토 색소폰 주자 아트페퍼 (Art Pepper) About Jazz
2010.12.13. 18:58
http://blog.naver.com/eldisjazz/140119739552
오늘 소개한 아트 페퍼(Art Pepper)의 음악세계
기묘하게도 쳇 베이커, 제리 멀리건이 그랬던 것처럼 아트 페퍼 역시 불행한 인생을 보냈다. 놀라운 사실은 아트 페퍼가 1952년부터 1982년까지 30년 동안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을 금기약물 문제로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간을 토대로 아트 페퍼의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정리가 가능해진다. 그의 일생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음악적인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데, 우선 1957~1959년까지가 그 첫 번째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위의 만화에서 다룬 화려했던 데뷔시절 그 이후의 시간이 되겠다. 리 코니츠(Lee Konitz)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 이 기간 동안에는 공격적인 블로잉을 피하면서 주로 쿨재즈에 입각한 포근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그다음 두 번째 시기는, 1960년대 전반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때가 음악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하다. 쿨의 대명사로 고착되었던 페퍼에 대한 이미지에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이 시기에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ine)과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의 거친 음색과 하모니, 역동성을 반영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하드밥에 대한 잠재성을 발산하게 된다. 연주 톤은 가늘어졌고 음의 시작은 거칠어졌으며 프레이즈는 짧아졌다. 부드러운 롱톤(Long Tone)의 연주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난 이때의 연주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는 표현과 개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시기는 상습적 마약복용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음악활동을 재개했던 1975년 이후 갱생의 길을 걷는 시점이다. 이 시기는 페퍼가 음악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간이었다.
50년대 초반 아트 페퍼의 연주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속도감과 리 코니츠(Lee Konitz)의 깊은 감성을 받아들여 양방의 스타일을 뽑아내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그는 웨스트 코스트 계열의 쿨재즈(Cool Jazz) 뮤지션들 중 가장 역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빠른 코드 체인지와 다양한 리듬, 속주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선명한 음을 구사했다는 점은 다른 재즈 뮤지션들에게서 보기 힘든 그만의 장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같은 알토 주자였던 찰리 파커의 영향으로 보인다. 동시에 아트 페퍼의 성장기 경력을 살펴보면, 10대 후반에 L.A.의 센트럴 애비뉴에서 대부분의 구성원이 흑인으로 이루어진 밴드에서 유일한 백인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했었다. 당시 유명했던 클럽 '알라바마'의 리 영(Lee Young)밴드에서 훗날 테너의 거장으로 부상하게 되는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과 함께 연주했었고, 베니 카터(Benny Carter), 제랄드 윌슨(Gerald Wilson), 프레디 웹스터(Freddie Webster), 제이제이 존슨(J.J. Johnson)과 나란히 무대에서 연주했었다.
1943년에는 백인 피아니스트 스탄 켄튼(Stan Kenton)악단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아트 페퍼는 메이저급 뮤지션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다. 아트 페퍼가 솔로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만큼, 그는 이미 스탄 켄튼(Stan Kenton)악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결국 아트 페퍼가 흑인들과 연습을 하다가 백인 악단에 들어가서 '짱을 먹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결국 당시 웨스트 코스트 재즈씬에서 유행하던 쿨 재즈 스타일과는 달랐던, 역동적인 페퍼의 비밥 스타일이 눈길을 끌었다는 얘기가 된다. 쿨재즈의 부흥 그 이면에는 비밥의 경이로움을 애써 외면하려했던 모순이 함께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82년 약물 후유증으로 사망한 아트 페퍼는 일생동안 마약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며 음악 하나만을 지탱해갔다. 하지만 그가 남겨둔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보여주었던 그의 음악 세계는 소위 전성기라고 말하는 시기보다 더욱 아름답고 따듯한 인간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50년대 초반 아트 페퍼의 연주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속도감과 리 코니츠(Lee Konitz)의 깊은 감성을 받아들여 양방의 스타일을 뽑아내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그는 웨스트 코스트 계열의 쿨재즈(Cool Jazz) 뮤지션들 중 가장 역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빠른 코드 체인지와 다양한 리듬, 속주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선명한 음을 구사했다는 점은 다른 재즈 뮤지션들에게서 보기 힘든 그만의 장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같은 알토 주자였던 찰리 파커의 영향으로 보인다. 동시에 아트 페퍼의 성장기 경력을 살펴보면, 10대 후반에 L.A.의 센트럴 애비뉴에서 대부분의 구성원이 흑인으로 이루어진 밴드에서 유일한 백인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했었다. 당시 유명했던 클럽 '알라바마'의 리 영(Lee Young)밴드에서 훗날 테너의 거장으로 부상하게 되는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과 함께 연주했었고, 베니 카터(Benny Carter), 제랄드 윌슨(Gerald Wilson), 프레디 웹스터(Freddie Webster), 제이제이 존슨(J.J. Johnson)과 나란히 무대에서 연주했었다.
1943년에는 백인 피아니스트 스탄 켄튼(Stan Kenton)악단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아트 페퍼는 메이저급 뮤지션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다. 아트 페퍼가 솔로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만큼, 그는 이미 스탄 켄튼(Stan Kenton)악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결국 아트 페퍼가 흑인들과 연습을 하다가 백인 악단에 들어가서 '짱을 먹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결국 당시 웨스트 코스트 재즈씬에서 유행하던 쿨 재즈 스타일과는 달랐던, 역동적인 페퍼의 비밥 스타일이 눈길을 끌었다는 얘기가 된다. 쿨재즈의 부흥 그 이면에는 비밥의 경이로움을 애써 외면하려했던 모순이 함께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82년 약물 후유증으로 사망한 아트 페퍼는 일생동안 마약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며 음악 하나만을 지탱해갔다. 하지만 그가 남겨둔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보여주었던 그의 음악 세계는 소위 전성기라고 말하는 시기보다 더욱 아름답고 따듯한 인간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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