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순례의 길

은이 공소 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만큼이나

Marine Kim 2015. 8. 12. 19:08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 내부 제대와 유해함.은이 공소 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 이상 가는 귀중한 사적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사적지인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텃밭으로 한동안 변해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상을 세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그가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바로 이곳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모바일용 요약 설명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입니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입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습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 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