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9]
'돈벌러 가자' 월남으로 월남으로
당시 군수품 수송업체 한진 길열어
'님은 먼 곳에' LP판 현지에서 불티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진은 폐허로 변해 가는 전장에서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금광을 캐면서 대그룹으로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사주팔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진은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또는 의정부나 동두천으로 미군 군수품을 수송하는 업체였다.
그러나 민간 기업으로서 월남전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아무리 선두업체였다 해도 일반 무역회사나 수송업체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월남전과 참전 한국군이 한진에는 은인인 셈이다. 편의상 오늘날의 한진그룹을 '한진'이라 칭하고 있지만 애초 한진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한진상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했고 무역을 주업으로 했다.
그러나 곧 무역업은 부업이나 다름없게 됐다.
창업주 조중훈 사장의 눈에 해방 후 모든 물자가 인천항으로 들어와 어디론가 수송되는 것이 보이는 순간 운송업이 사업적으로 실익이 크겠다는 것을 간파하고 트럭 한 대를 구입해 물자수송에 나섰다.
이것이 본업으로 발전한 '한진그룹'의 시작이었다. 한진의 성장엔진을 가동한 인물은 단연 조중훈 전 회장과 조중건 전 부회장(당시 상무) 형제였지만 특히 조중건 상무(편의상 월남전 시점의 직책으로 한다)의 활약은 타고난 친화력과 미군 인맥을 통해 나타났다.
물론 형이 닦아 놓은 주한 미 8군 인맥도 상당했지만 조 상무의 한국군 통역장교 시절 맺었던 인맥과 미 장성들은 무시 못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 상무는 미국 버클리대학 출신이다. 정재문 전 국회의원이 버클리대학 출신으로 한국 총동문회 회장을 지내면서 한때 한국 사회에서 버클리 영향력이 제법 힘을 과시했다.
버클리대학은 미국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최상위급 명문 대학이다. 에피소드지만 부근의 유명한 사립 A대학과 비교해서 말할 때 A대학은 엄청난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부모보다 못난 자식'이 다니고 버클리대학은 '부모보다 잘난 자식'이 다닌다는 말도 있었다.
일본을 때린 원자탄도 버클리대학에서 만들어졌지만 인터넷을 최초로 개발하는 등 세상을 바꾸어 놓는 대학으로도 유명해 미국에서도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 명문대 출신인 조 상무는 졸업 후 모교에 500만 달러를 기부해 '찰리 조' 강의실이 별도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명사가 됐고 군부에도 폭넓은 인맥이 있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월남에서 한진이 수송으로 부를 축적하기까지 한진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다.
월남전을 경제성장의 디딤돌로 활용해야 한다는 정부의 절실하고 확고한 정책이 뒷받침되면서 한국군 사령부의 지원과 정부의 인력수출에 따른 지원 등 민간 기업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적 혜택까지 적지 않게 받은 것이다.
거기에 미군의 협조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한진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놓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로서는 근로조건에 관한 기본적인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던 탓이겠지만 부를 축적해 가는 과정에서 근로자들 처우 문제가 불거져 월남 현지에서 스트라이크가 발생했고 귀국 후에는 KAL빌딩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무총리가 기자회견까지 열어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사과를 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한진이 최초로 민간 수송부대처럼 대규모 근로자들을 파월시켰다는 것은 정부나 기업으로서나 가슴 벅찬 일이었다.
민간 근로자들이 대거 월남으로 간다는 것은 월남의 인력시장을 연다는 의미가 컸고 군인이 파병되는 것과는 달리 부수적으로 챙기게 되는 경제적 실리가 상당했다.
군인에게는 정해진 전투수당과 일정한 군수용품이 투입되는 반면 한진이 시장을 열면서부터 여행 알선부터 세탁업자들까지 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뭐든지 '외화벌이'가 가능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한진은 파병이 끝날 때까지 5년여 동안 수송과 하역만으로 1억3000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1967년도 '경제통계연보'에 따르면 64년에 한국의 월남수출이 630만 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비전투부대와 전투부대가 점차 증파되면서 65년과 66년에는 1470만 달러와 1380만 달러로 각각 늘어났다.
전경련이 발간한 68년도 '한국경제연감'에 따르면 민간 수송업자들이 진출을 본격화하는 67년 한 해에만 운수와 하역 세탁업과 전기수리공 등 용역수입이 자그마치 3268만5000달러에 이른다.
허벅지가 늘씬하게 드러나는 베트남 전통복장을 입고 위문공연을 떠난 연예인들 수입과 사진사 초상화 화가들 수입까지 보태지면 더 많은 달러가 부수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는 없었지만 동양TV 연속극 주제가 '님은 먼 곳에'는 70년 이후부터 월남의 애창곡이 되면서 LP판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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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0]
한진 조중훈 회장 '첫 눈에 금광 보여'
중앙정보부 인력수출위해 해외개발공사 세워
불도저 기사 모집광고하자 하루 1만여명 몰려
1966년 11월 해외개발공사에서 공개모집한 기술자들이 필기시험을 치르고 있다.
민간인 파월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회사가 한진이라면 유휴인력을 동원하듯이 모집해 보낸 곳은 '해외개발공사'였다.
한국 최초의 '인력수출' 공식 창구였던 해외개발공사는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 석정선 차장보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면 김종필(JP)의 오른팔로 '하극상 사건'의 주역 중 하나지만 이미 62년 5월부터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과 인력수출 문제를 논의하는 밀담을 나눴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맨이었다.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기능공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해 전국기능경연대회를 개최하도록 했던 것도 그였다.
석 차장보는 당시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심흥선 소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 이훈섭 합참군수기획국 차장 등과 함께 군사시찰단 일원으로 월남에 도착해 고딘디엠 대통령과 직접 극비 회담을 한 후 해외개발공사를 만든 것이다. 생전에 LA에서 인터뷰를 했던 석 차장보는 정부가 얼마나 월남전을 경제발전에 활용하려 했는지를 가감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62년 5월 11일 고딘디엠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건 비화지만 사실 정부 안에 청와대 안에서도 반대파가 있었어요. 장병뿐만 아니고 민간인 파월까지 반대파가 있었다구요. 극비로 진행했는데 내가 떠나기도 전인 5월 3일 이후락 공보실장이 밀사 파견을 암시하는 얘기를 해버린 거예요.
말은 월남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했지만 그걸 표면적으로만 해석할 사람이 몇이나 됐겠어요. 그 얘기 속에는 이미 밀사 파견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리가 담겨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정치권에서 소란해지고 말이지. 박정희 의장이 화가 굉장히 났는데 그런데도 일단 갔다 오라고. 그래가지고 귀국하자마자 인력을 수출할 수 있는 공식 창구를 만들자 그게 해외개발공사가 된 겁니다."
-시점으로 보면 상당히 앞선 구상이 된 건데요. 민간인 파월은 66년부터 되지 않습니까.
"물론 시간이 걸렸지요. 1차 파병이 64년 9월인데 처음에 LST(상륙함)를 타고 사이공 동남쪽 123km 떨어진 몽타우에 101외과병원단과 태권도 교관단이 갔으니까. 그 후에도 미국과 외교문제 전투부대 파병 문제 복잡한 일이 많았잖아요.
하여간 해외개발공사를 처음에는 순전히 월남전만 보고 인력수출을 위해 만든 겁니다. 그때 목표가 10만 명만 보내자 그랬다구요.
우리 장병이 5만이다 6만이다 하는데 기술근로자를 10만 명 보내려고 했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그 당시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노는 사람은 많아도 기술 근로자가 그만큼 있기나 해요? 그렇지만 일단 시도를 해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일단 해 봐야 알 것 아니냐 해서 시도를 했어요.
근데 막상 하려고 보니까 월남은 전쟁 중이고 우리는 월남하고 용역창구가 없고 결국 미국 용역회사에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랬더니 당장 오케이야. 한 사람당 핸들링 비용 100달러씩 받기로 하고 근로자들은 무조건 500달러씩 해서 보내기로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을 하면서 불도저 운전기사를 모집한다고 광고를 내니까 하루에 1만 명도 더 몰려와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불도저 운전수가 많을 줄 몰랐지. 근데 전부 가짜야 하하하.
운동장에 불도저 몇 대 빌려 놓고 시동만 걸 줄 알면 합격시킨다고 했더니 전부 시동을 다 걸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옆에 시동 거는 놈 하나만 있으면 순식간에 눈치로 다 배워요. 그걸 보면서 우리 국민은 달나라에 보내도 다 살아남을 거고 월남에 풀어만 놓으면 다 벌어 먹을 거다 해서 전부 보냈어요 하하하."
한진이 월남의 수송과 하역 시장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지만 독불장군은 아니었다. 정부가 인력지원을 했듯이 한국군 사령부의 지원도 결코 적지 않았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한진이 용역계약 만료로 미군 용역회사에 수송과 하역 일을 빼앗기게 됐을 때도 채명신 사령관이 스몰렌 사령관과 붙은 담판에서 이기지 못했으면 한진은 그것으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진출 초기부터 준비성도 없었고 허술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채명신 전 사령관도 웃으면서 엉망이었다고 했다.
"내가 하노이 방송에서 하는 것을 직접 들었는데 처음에 영어로 하고 다음에 한국말로 그 다음에 월남말로 방송을 해요. 거기서 1달러에 팔려간 한국용병 괴뢰도당들이 용병으로 팔려왔다 이런 식으로 악선전을 하고 있는데 이게 전 세계에 다 퍼져 나갑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우리 장병들의 사기 문제 우리 근로자들의 사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하고 업체도 우리가 직접 보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구요.
그래야 팔려오지 않았다는 증명이 되잖아요. 한진이 전부 다 자기들이 잘한 것처럼 그러지만 비교를 하자면 현대는 62년에 이미 캄란에 준설공사 하러 들어와서 이동 없이 한 곳에서 공사를 하지만 특히 한진은 일 자체가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걸 우리가 다 보호했다구요.
그런데 한진은 처음엔 물 마실 준비도 안 해 왔어요. 물이 얼마나 중요해요. 처음 해외에 나와서 그랬는지 말라리아도 있는데 모기장 하나 안 가지고 오고. 우리 장병들이 야전침대를 다 나눠 쓰고 모기장도 한 사람씩 덮게 되어 있는데 두 사람씩 덮고 한진에 나눠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쌀이 떨어지기도 해서 쌀까지 나눠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저걸(한진) 키운 겁니다."
-한진은 우리 파월장병과 사령관님에게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군요.
"구태여 그런 걸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했으면 좋겠어. 그때 한진의 조중훈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요? 내가 우동 한 오라기 얻어먹은 것도 없고 우리가 한진을 위해서 간 것도 아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 우리 근로자들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도와준 거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장병들이 자기네들 신변 경호 다 해 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한진이 크게 성공했으면 파월장병들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될 텐데 나중에 고엽제 환자들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돼서 환자들을 위해 지원을 좀 해줬으면 했더니 고마운 거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구먼."
어쨌든 한진은 월남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먼저 조중훈 사장부터 나섰다. 훗날 조 회장은 월남 진출에 대해 인터뷰하는 동안 줄곧 껄껄 웃으면서 첫눈에 금광이 보이더라고 말할 때는 다소 흥분하기도 했다.
"월남에 무슨 목적으로 파병을 했는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난 사업가니까. 그때 한창 유행했던 노래가 '황포돛대'라고 있었는데 노래 가사처럼 황혼이 쫙 깔릴 무렵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퀴논 항이라고 있는데 하역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수송이 안 돼서 배가 한 40여 척 정박하고 있더라구. 아마 그때 맹호사단이 도착하고 나서 한국 민간인으로는 내가 처음일 거예요."
이호/객원기자·작가
[출처]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9.10|작성자 오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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