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14]

Marine Kim 2021. 1. 9. 23:10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최빈국 한국 '전쟁통해 경제재건 실탄'

 

당시 한국 GNP 60'북한에도 크게 뒤져'

전투부대 파병 협상전략 차지철 '반대 쇼'

 

1961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소장. 맨 우측이 육군대위 차지철. 당시 한국은 GNP60불 수준으로 북한에 경제적으로 10년이상 뒤져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린다.

 

건국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가의 논란처럼 건국 60주년의 실질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건국 후 해외 전장에 장병을 파병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가 처음이었고 파병의 성격을 규정할 때 6.25 참전에 대한 보은과 자유우방 지원 북한 도발 억제와 국방력 향상이었다.

 

이와 함께 경제부흥의 발판 마련이라고 했던 만큼 건국 60주년의 의미 속에 월남파병은 분명한 하나의 획을 긋는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19652월 사이공 정부를 돕기 위해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은 약 10년에 걸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끼쳤다.

 

그중에 특히 한국은 '월남특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경제재건의 실탄을 마련하고 '한진'이라는 이름 없던 작은 수송업체와 극동 삼환 대림 현대건설 등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해 준 게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말이다.

 

1966년 일본 외무성 경제국이 발표한 '베트남 평화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 한국 등이 베트남 전쟁으로 GNP가 평균 3% 증가했다.

 

69년에 발행된 '이코노믹 리포트 오브 프레지던트'는 미국의 특별비 예산이 651억 달러였던 게 1년 만에 58억 달러 4년 후에는 257억 달러로 급팽창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의 특별비가 대부분 전쟁 비용으로 사용된 것이겠지만 필연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간접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경제 측면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뿐 아니라 세계 전역을 변화시켰다.

 

실제로 태국 같은 나라는 아시아권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국이 됐다. 태국은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전략기지를 제공하면서 반대급부로 상당한 원조를 받아 사회간접시설 정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기지 사용에 따른 비행장 항만 등 미군을 위한 위탁시설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건설 수요를 일으켰다. 한국이 최초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태국에서 수주했던 현대건설의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 바로 미국 원조 자금이었다.

 

물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필적하는 근대화 무기와 5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나고 여론이 악화되자 인도차이나반도에 국한된 지역전쟁으로 성격을 축소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예산지출로 재정적자 인플레 국제수지 악화 달러가치 하락 등이 겹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은 경기가 호전되면서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이고 님은 먼 곳에 가 있지만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하이힐을 사 신고 미장원이 성업했다. 춤바람이 사회문제화하기도 했으나 '내 집 마련'이라는 관심사가 그때부터 국민 사이에 회자하기 시작할 만큼 '월남 달러' 덕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반면 195510월 유엔 UNKRA(한국재건위원회) 특별조사단장인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고서를 쓴 것은 경제적 비아냥거림이었다.

 

메논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유엔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특별조사단이 내한했던 그 무렵의 실질적인 GNP60달러 언저리로 세계 최빈국 상황이었다. 6.25 이후 생산시설 파괴로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외환보유액도 2300만 달러 정도였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억지에 가까운 온갖 비용을 뜯어낼 정도로 추락한 필리핀이지만 55년 무렵만 해도 한국은 필리핀보다 훨씬 못했고 북한도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 북한은 남침을 계획하면서도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를 진행시켜 60년 초반에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할 정도였다.

 

한국도 이승만 정권 때부터 경제개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으니까 시점으로 보면 북한은 한국보다 10년 앞서 경제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던 셈이다.

 

어쨌든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외자 도입으로 산업화를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만큼 위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외자 도입은 해외의 돈을 국내로 가져와 국내 통화량을 증가시키고 결국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통화 증가만큼의 경제성장을 해야 하고 실질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최빈국 경제개혁은 위험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남파병은 외화 획득의 절대적 기회가 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은 박정희가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정치권의 논란이 가열됐지만 추진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는 3차 파병안 논의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부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다. 의원총회에서였다.

 

"나는 여당의원이지만 3차 파병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된다면 분명히 반대할 것입니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기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군대조차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 특권층 자식들부터 전선에 서게 한 뒤에 외국에 파병을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자기 자식들은 안전지대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나서게 한단 말입니까? 상정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공화당 소장파를 대변하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측근인 차 의원이 공개적으로 파병을 반대한 것은 박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미국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쇼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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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4]

 

편도티켓 들고 죽을 각오로 떠나

 

미포병학교 출신 '찰리 조' 조중건 월남행

미군 사령관 교섭 특명한국군과도 친해

 

마침내 한진은 조중건 상무를 앞세워 월남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 조중훈 회장이 4511'한진상사'를 창업했지만 그 전에는 자동차 피스톤을 재생해 판매하던 '이연공업사'라는 소규모 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모든 산업시설을 군수지원 체제로 묶었고 조 회장도 피스톤 수리공장을 닫아야 했다.

 

그 후 해방과 함께 한진상사를 만들어 무역업과 수송사업으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급성장의 무대는 월남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현장을 지휘하는 미군 사령관들을 만나 교섭하는 것은 조중건 상무의 몫이었다. 그는 66123일 왕복 티켓도 아닌 편도(출발) 티켓만 손에 쥐고 성공하지 못하면 월남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떠나는 것이다.

 

친화력이 뛰어난 조중건 대한항공 전 부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조중훈)이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나는 재주를 부렸을 뿐'이라며 형에 대한 애정부터 나타냈다.

 

"그 양반(조중훈)이 머리가 참 비상합니다. 나하고 열두살 차이의 형님인데 같은 원숭이띠예요. 원래 엔지니어인데 휘문고보 3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져 해양대학의 전신인 진해해원양성소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2등기관사 면허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집에서 라디오 재봉틀 같은 게 고장 나면 직접 다 고치고. 자동차 피스톤 공장을 한 것도 그런 재주가 있으니까 했던 겁니다. 물론 배도 탔지요. 외항선을 탔는데 1940년대에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를 쭉 다니면서 그때 세계가 이게 아니구나 정말 여러 가지 식견을 넓혔을 거예요.

 

그런 양반인데 한진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는 직접 들으셨을 테니 잘 알겠지만 나하고 펜타곤에 갔다가 식견이 넓으시니까 월남에 금광이 있다고 내다본 겁니다. 그게 사실상 시작입니다."

 

-부회장님은 언제부터 월남에 뛰어드는 겁니까.

 

"비서실장 겸 상무 때지요. 내가 536월에 유학 장교로 미국 가서 미 포병학교 교관으로 2년 다시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까 미국에서 6년 동안 있다가 59년에 돌아왔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좋은 장군들 만나고 친구들 사귀면서 아주 좋았는데 와서 보니까 그때 한진의 1년 외형이 70~80만 달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을 때 형이 벤츠 타고 다닌다고 자랑해서 굉장히 버는 줄 알았거든. 하하하. 하여간 내가 귀국하면서 같이 일을 했는데 60년에 보니까 수송으로 약 170~180만 달러가 되고 무역까지 228만 달러를 벌었어요. 그때 삼성이 제일모직.제일제당 한국유리가 판유리 공장 이런 걸 했고 우리는 수송을 중심으로 했지요. 운송부문에서는 최고였어요.

 

그러면서 61년에 서울~인천 간을 운행하는 고속형 한진버스 사업을 한 겁니다. 누구도 생각 못했을 때 아이디어였지요. 그러다가 월남파병으로 시끌벅적하니까 이 양반이 펜타곤에 가자고 하시더니 66년에 월남 가라고 하잖아요. 하하하."

 

조중건 상무를 미국인들은 '찰리 조'라고 불렀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미국인들이 그를 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미국 생활에서 보여준 그의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부인하지 않았다.

 

"나야 한국군에서 통역장교로 2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교관으로 2년 버클리대학에서 4. 그러니 한국군도 알지 미국 군대도 알지 대학도 미국에서 다녔으니까 월남 가서 수송 물량 교섭하라는 형님 얘기는 당연한 거지요.

 

미국 사람 만나봐야 미국 대학 나왔을 거고 미군들 만나봐야 포병학교 출신 아니면 보병이거나 수송병과일 텐데 한 사람 건너면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형님이 수송 사업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월남에도 많이 있을 거고. 그러니까 안 될 일이 없겠다 싶은 거지요.

 

한국군도 웬만한 장군들은 거의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구요. 내가 박 대통령도 광주 포병학교 때부터 잘 알았지만 나중에 미국 포병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마침 거길 유학 오셔가지고 6개월을 같이 있었어요.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미국에서 고생한다고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그러셨어요.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는데."

 

-국내서 통역장교도 하셨고 포병학교 교관까지 하셨으면 군 인맥이 상당했겠군요.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국군의 역사이기도 한데 5.16 때 박 대통령과 행동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이 사실은 광주 포병학교 출신들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그때가 52년이지요.

 

많은 고참 대령들이 광주 포병학교에서 단기 특별교육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군사고문단이 볼 때 전쟁은 해야 하는데 한국군 화력이 엉망인 겁니다. 화력이 전혀 없었잖아요. 한국군을 보강시켜야 되겠는데 전차부대도 없지 포병도 없지 굉장히 고민했다구요.

 

원래는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가 지원을 해 줘야 되거든요? 3개 대대가 실전을 하고 1개 대대는 예비대대로 있어야 되니까요. 근데 포병이 1개 대대밖에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미 군사고문단에서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를 만드는 겁니다. 급조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없다니요 무슨 얘기입니까?

 

"그때까지 포병은 워낙 TO가 조금밖에 없었기 때2 겁니다. 그게 배경인데 그때 박경원(전 내무부 장관) 이기건 김동빈 송석하 그런 분들이 광주에서 특별교육을 받은 거예요.

 

박 대통령은 광주 포병학교에서 교관을 했고. 나중에 총무처 장관을 지낸 심흥선 그분은 교장을 했고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 장군은 부교장으로 계셨죠. 그때 내가 광주포병학교에서 심흥선 교장의 보좌관 겸 통역관으로 있었으니까 자연히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인연으로 한국군도 웬만하면 다 아는데 5.16 일어나고 나중에 보니까 전부 아는 사람들이지 뭡니까 하하하."

 

한진은 운을 타고난 셈이었다. 찰리 조로 알려진 조 상무가 마침 귀국해서 한진에 있었다는 것도 이미 짜여 있는 운명의 설계도처럼 착착 손발이 맞아 들어갔지만 한진이 월남 진출을 결정했을 때는 미군의 투입도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군 병력이 대량 투입된다는 것은 그만큼 하역과 수송해야 할 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한진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인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출처]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14]- 박정희, 김용태에 '전황 파악' 밀명 |작성자 오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