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순례의 길

순교, 그 삶과 얼 발자취를 따라서 - 홍주순교성지

Marine Kim 2016. 11. 17. 12:47

가톨릭 리빙] 순교, 그 삶과 얼 발자취를 따라서 - 홍주순교성지


‘충렬의 땅’이자 ‘순교의 땅’인 홍성. 최근 충남 도청이 홍성군 홍북면에 들어서면서 내포의 핵심 도시로 떠올랐지만, 홍성으로 가는 길은 멀다. 교통 편이 여의치 않아서다. 뜨문뜨문 장항선을 따라 서해 7개 관광지를 운행하는 서해 금빛열차를 타고 가는 게 그 중 편안한 여정이 될 듯하다. 해미와 함께 내포 교회의 대표적 순교지로 떠오른 홍주순교성지는 홍성에 있다. 깊어가는 가을 녘, 홍주순교성지로 떠났다. 순교, 그 삶과 얼, 숨결, 그리고 채취를 느껴보기 위해서다.

길을 걷다가 뒤돌아본 나뭇가지에 가을 햇살이 걸렸다. 혼 속까지 비추는 듯한 투명한 빛이 아련하다.


100여 년 전 한때는 춥고 마음 고픈 생의 긴 겨울 집에서 한파에 숨을 죽여야 했지만, 지금은 명징한 하늘을 즐기는 일만으로도 마음 푸른 가을 녘이다.

지금이야 홍성으로 불리지만, 1914년 이전까지 홍주군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이듬해, 일제에 항거한 900 의병의 시신으로 홍주가 뒤덮였고, 8년 뒤 일제는 홍주군을 결성군과 합쳐 홍성으로 개칭하고 억눌렀다.

하지만 이에 앞서 1791년 신해박해 시기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80여 년간 홍주는 ‘순교의 땅’이었다.


순교의 땅에서 영광의 땅으로

천주교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가 1000여 명을 헤아렸고, 그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212위에 이른다. 이 중 1791년 신해박해로 잡힌 ‘내포의 첫 순교자’ 원시장(베드로, 1732∼1793), 1799년 기미년 박해 때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1799)와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 1801년 신유박해 때 피를 흘린 ‘백정 순교자’ 황일광(시몬, 1757∼1802) 등 4위가 2014년에 시복돼 ‘영광의 땅’이 됐다.

홍주순교성지(전담 최교성 신부) 하면, 도심 곳곳에 내포 순교자들의 증거와 얼이 배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지 측에선 이들 증거 터와 순교 터를 6개 코스로 나눠 순례지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순례 코스가 긴 것도 아니다. 다 평지이고, 총연장 1.5㎞에 불과하다. 천천히 기도를 바치며 걸어도 1시간이면 너끈하다. 빨리 걸으면 30분밖에 안 걸리지만,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다.

증거 터 홍주목 동헌을 시작으로 순교 터 홍주옥 → 증거 터 홍주 진영(경사당 터) → 증거 터 저잣거리 → 순교 터 참수 터(월계천 북문교) → 순교 터 생매장 터(월계천과 홍성천 합수머리)로 이어진다. 될 수 있는 한 느리게 걸으며 기도하고 묵상해야 그 숨결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신앙 지켜낸 곳 - 홍주목 동헌

-
홍주목사의 동헌인 안회당. 그 뒤로 수상정자인 여하정이 있고, 홍주목사는 여하정에 앉아 천주교 신자들을 문초했다고 전해진다.


역에서 2.1㎞가량을 걸으면 홍주 관아다.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홍주아문을 지나 군청 뒤로 돌아가면 충청우도, 곧 내포의 중심지였던 홍주목사 동헌이 나온다. 22칸짜리 목조 기와집인 사적 231호 안회당(安懷堂)이다. 그 뒤엔 연못에 기대듯 누운 고목과 연꽃 사이에 놓인 정자 여하정(余何亭)이 있다.

들어와 보니 벌써 순례자들이 동헌 여기저기를 살핀다.

최근 들어 다도 문화 체험 공간으로도 쓰이는 안회당의 뜨락은 마냥 평화롭다.

그 뒤로는 2013년에 복원한 홍주읍성 남문 ‘홍화문’(洪化門), 홍주성 역사관이 들어서 있고, 오는 2018년 홍주 탄생 1000주년을 맞기에 앞서 북문인 ‘망화문’(望華門)까지 복원하면, 순례와 함께 읍성 관광을 겸하는 명소가 될 듯하다.

내포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관장했던 홍주목사가 머물던 안회당과 여하정은 증거 터다. 신자들은 잡혀 오자마자 문초와 함께 갖은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내포의 첫 순교 터 - 홍주옥

-
1872년에 제작된 홍주지도에서 원형 담장 안에 옥사 1개 동이 있던 사실을 확인한 뒤에 2012년 복원한 홍주옥사. 마당에는 죄인을 때리던 나무 형틀이 복원돼 있다.


형을 받다가 날이 저물면 옥에 갇혔는데, 그 옥사 곧 홍주옥은 관아 넘어 주차장 끝자락에 있다.

1872년에 제작된 홍주지도에서 원형 담장 안에 옥사 1개 동이 있던 사실을 확인한 뒤에 2012년 복원한 홍주옥사는 내포의 첫 순교 터로, 무려 113위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다. 교수형과 장살형에 처해졌고, 질병과 기아로, 때론 동사(凍死)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무수히 죽어갔다.

양반이나 중인이 아닌, 평민으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로 기록된 원시장 복자는 홍주옥사에서 동사했는데, 124위 순교자 약전에는 그가 갖은 매질과 형벌에도 죽지 않자 홍주목사의 지시로 1793년 1월 28일 한겨울에 옥사 밖에 그를 내다 놓고 몸에 차가운 물을 부어 얼어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 신부나 샤스탕 신부 등도 홍주옥에 갇히기도 했고, 갈매못 순교자인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루카) 회장 등도 홍주옥사에 갇혔다는 기록이 있다.

홍주옥사 순교자들 가운데 세 차례나 체포와 유배, 옥살이를 겪다가 순교한 이여삼(바오로, ?∼1812)과 같이 예비신자 순교자들도 적지 않아 홍주옥사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순교성지로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복자의 순교 용덕 전해지는 곳 - 홍주 진영

-
인천교구 상3동본당 순례자들이 최교성 신부에게서 홍주 진영 순교자인 박취득 복자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멀리 뒤에 보이는 문루가 홍주읍성 동문인 조양문이다.


홍주옥사에서 읍성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으로 가다 보면, 문루 못 미처 증거 터인 홍주 진영장의 동헌이 있다. 홍주 무관과 병사들이 주둔하며 훈련하던 경사당으로, 지금의 한국통신(KT) 부지다. 홍주 진영에서 1400대가 넘는 매를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는 고문까지 당하다가 결국은 1799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박취득 복자를 빼놓을 수 없다. “죽임을 당할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는 복자의 순교 용덕이 오늘에까지 전해오는 듯하다.


온갖 조롱 속에 조리돌림 당한 장소 - 저잣거리

진영장 동헌 뒤로 돌아가면, 증거 터인 홍주성 저잣거리 터가 나온다. 저잣거리 터는 당시 성내에서 가장 번화했던 장터로, 진영장이나 목사의 동헌, 옥사로 끌려가기에 앞서 신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한 곳이었다. 손과 발을 묶이고 벌거벗기운 채 ‘사학죄인’라고 쓰인 팻말을 목에 걸고 끌려다니며 모욕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인내와 순교 신심을 느껴볼 수 있는 사적이다.


살아서는 지상 천국, 죽어서는 내세 천국 - 참수 터

발길을 돌려 한창 복원 공사 중인 북문 망화문 복원 터로 방향을 틀은 뒤 월계천으로 향한다. 북문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하천 변에 참수 터가 있다. 이 참수 터는 124위 복자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황일광 복자의 목이 잘린 곳이다. 124위 약전에 기록된 대로 황일광 복자는 천민 중 천민인 백정 출신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이름을 증언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하셨다. 그는 ‘살아서는 지상 천국’을, ‘죽어서는 내세 천국’을 살았다. 병인박해 때는 유 마르타 순교자가 참수형을 받기도 했다.


참혹한 순교 현장 - 생매장 터

참수 터에서 월계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성천이 만나는 곳에 또 모래가 쌓인다. 이곳이 바로 생매장 터다. 길 건너 ‘홍주 의사총’과 마주하고 있다. 홍주 생매장 터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내포 신자들을 잡아들여도 수용할 옥사가 부족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최법상(베드로)과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생매장한 참혹한 순교 현장이다. 생매장터는 2008년 3월에 이르러서야 순교성지로 재조명됐고, 최근엔 조각가 고영환(토마스, 56)씨가 3년에 걸쳐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생매장 터에 세워져 순례자들의 기도 공간이 되고 있다. 순례 문의 : 041-633-2402

최교성 신부는 “홍주성지는 임대 사무실과 성당이 전부지만, 읍성 안팎을 돌며 순교 터와 증거 터, 생매장지를 다 돌아보며 묵상할 수 있는 성지”라며 “기도하면서 걷다 보면 순교자들의 신앙을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