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항상 영원히

1987년부터 꺼지지 않고… '평화의 상징'된 촛불

Marine Kim 2016. 12. 7. 13:44

1987년부터 꺼지지 않고… '평화의 상징'된 촛불

어느새 광장에서의 촛불 집회는 '평화 집회'로 자리 잡았다.
여당 국회의원은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지게 돼 있다"고 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약 15년 동안 굵직한 사건마다 등장해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 집회를 들여다봤다.

  •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 입력 : 2016.12.06 08:10

촛불이 '시위'에 처음 사용된 건 1968년 5월 미국에서다. 베트남 반전 운동가들이 촛불을 들고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친 게 그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촛불시위가 대중화되지 못했다. '추모'의 자리에서만 종종 등장할 뿐이었다.

/이태경 기자

우리나라의 최초 촛불집회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격적인 촛불 집회가 있던 2002년 이전,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몇몇 집회가 있었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서울 명동에서는 군사독재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들었던 시위대를 대신해 평화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촛불을 든 시민 1만5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촛불시위가 있었다. 1992년에는 하이텔 유료화에 반대해 촛불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평화 시위'로 자리잡은 촛불 집회

 

우리나라에서 '촛불 집회'가 본격적으로 출발한 건,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신효순·심미선(당시 중학교 2학년) 양을 추모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경기도 양주시에서 길을 가던 두 학생이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7일 오후 6시쯤 서울 광화문 네거리 모인 1만여명의 시민들이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미국의 무죄 판결에 항의하며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조선DB

처음에는 단순한 추모 성격의 집회였지만, 그해 11월 미군 법정이 사고 운전병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리면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로 바뀌었다. 미국 측에서는 해당 사건이 단순 교통사고에 불과하다는 태도였고, 이에 희생자와 같은 또래의 중학생뿐 아니라 어르신과 부모까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촛불집회를 통해 SOFA(주한미군 주둔군 지위협정) 협정에 대한 개정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죄를 저지른 주한 미군은 국내법대로 처벌할 수 없고, 미국으로 송환돼 미국의 법대로 심판받도록 하는 조항이 불합리하다는 목소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촛불 민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탄핵안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는 그해 3월부터 헌법재판소가 기각 결정을 내린 5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2004년 3월 13일 밤 서울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펼쳐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는 시민 5만여명이 참석, 차도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벌였다.

2004년 2월경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방송기자 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며 특정정당 지지 발언을 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열린우리당은 이에 저항하며 불참했다. 열린우리당이 빠진 채 진행된 본회의에서는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국회의 이 같은 결정에 반발한 국민은 대대적 촛불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 추산으로 20만 명, 경찰 추산 13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탄핵을 지지하는 집회 또한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탄핵 찬성과 반대 집회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끝났다.

촛불집회의 결과물은 2004년 4월에 열린 17대 총선에서 나왔다.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의석수를 확보하며 원내 과반수를 채웠지만, 새천년민주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한·미 FTA 쇠고기 협상 반대 집회는 그해 5월 2일부터 8월 15일까지 100일 넘게 지속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 기간 총 93만 명의 시민이 2398회에 걸쳐 촛불집회를 개최했다. 이른바 '광우병 촛불집회'로 불리는 이때를 기점으로 특정 집단보다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8년 5월 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문화제를 하고 있다./조선DB

당시 MBC의 'PD수첩'에서는 광우병 소에 대한 위험성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왜곡보도 및 의도적 오역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광우병이 공기로도 옮겨진다, 물로 끓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뇌에 구멍이 뚫려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는 등의 괴담이 퍼져나갔다.

중고등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은 광우병에 대한 공포감을 바탕으로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충실한 설명이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FTA를 추진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아기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와 '유모차 부대'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2011년 5월경부터 6월까지 매주 금요일 전국등록금네트워크와 한국 대학생연합(한대련)은 반값등록금 도입을 촉구하며 촛불집회를 열었다. 경찰 추산 600여 명의 대학생이 참여했다. 고려대와 서강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 서울지역 4개 대학 총학생회가 '반값 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며 동맹휴업을 하기도 했다.

한대련 등은 6·10항쟁 24주년 기념행사까지 겸해 수천 명을 동원한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당시 집회에서는 '2008년 촛불을 부활하자', '촛불아 다시 모여라.' 같은 구호가 나왔다.

2011년 6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촛불집회가 열렸다./조선DB

한대련 등은 6·10항쟁 24주년 기념행사까지 겸해 수천 명을 동원한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당시 집회에서는 '2008년 촛불을 부활하자', '촛불아 다시 모여라.' 같은 구호가 나왔다.

어게인 2008 광우병 촛불?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촛불로 리본 형상을 만들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그러나 정부 규탄 성격의 집회로 변질하기도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대통령 퇴진' 등을 요구했다. 현장에서는 참여연대,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나꼼수, 미권스, 엄마의 노란 손수건, 나는 꼼수다, 향린교회, 금속노조, 노동당, 정의당 등 40여 개 단체의 깃발이 눈에 띄었다.

2014년 5월 1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추모 5.17 범국민 촛불행동' 마친 참가자들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울광장을 향해 행진을 벌이고 있다./윤동진 객원기자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서울광장까지 행진하며 "박근혜는 퇴진하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쳤다. 행진의 여파로 광화문, 종로, 을지로, 시청 인근을 지나는 차량은 극심한 교통 체증을 겪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10시쯤 서울광장에서 해산했지만, '횃불시민연대'라는 단체 회원 등 115명은 청와대로 진출을 시도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최대 규모 촛불집회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진상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어느덧 6차까지 진행됐다. 초기에는 일부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시민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평화 시위'로 완전히 바뀌었다. 12월 3일 6차 촛불 집회에서는 사상 최대 인원인 232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광화문광장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촛불을 들고 청와대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역대 최대 시위에도 연행자와 경찰 부상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기도 했다. 자칫 흥분한 시위꾼이 끼면 폭력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지만, 집회 참가자들은 끝까지 자제하며 평화 시위를 유지했다.

외신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최순실 국정 농단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이 대규모 평화시위만큼은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매우 평화로웠고 축제 같았다"고 전했다. 영국 BBC는 "대규모 집회에서 폭력이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 CNN방송은 "수만 명의 시위대가 또다시 서울 거리에 모여 박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했다"고, 포린폴리시는 "촛불집회는 김치만큼이나 한국적"이라고 보도했다.

외신 "촛불집회는 김치만큼이나 한국적"… 일제히 보도

'폭력'은 거부한다

올해 촛불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폭력'이다. 촛불집회 자체가 '평화'를 상징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촛불집회는 집단과 집단이 모여 폭력 사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6차 촛불집회까지의 과정을 보면 '평화 시위'의 모습이었다.

외국 언론도 주목한 평화시위는 시위 구성원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날 촛불 행사를 주관한 민노총 등 노동 시민단체들의 색깔을, 광장을 뒤덮은 시민들이 지워 버렸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단위의 시위 참가자들은 시위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김지호 기자

여기에 스마트폰은 시위대와 경찰 모두를 긴장시키는 감시자 역할도 했다. 이날 밤늦게까지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한 경복궁역 일대에는 'LIVE'라는 글자가 번쩍이는 스마트폰들이 현장을 찍고 있었다.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는 스마트폰들이었다. 이들 1인 방송 때문에 경찰이나 시위대 모두 거친 행동을 하기 힘들었다.

시민들은 조금이라도 충돌이 빚어질 조짐이 보이면 "비폭력"과 "평화 시위"를 연호했다. 6차 촛불집회 날 자정이 넘어 효자 치안센터 앞에 있던 의무경찰 2명이 시위대 쪽으로 나오자, 일부 시위대가 욕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그러지 마세요. 평화시위 합시다"라며 제지했다.

갑자기 쓰러진 시민을 경찰과 시민이 한마음으로 돌보기도 했다. 이날 밤 11시쯤에는 한 시민이 갑자기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의사·간호사 등이 모여들었다. 환자 옆에 있던 시민들이 "환자의 체온이 떨어진다. 핫팩이 필요하다"고 외치자, 차 벽 위에 있던 경찰들이 '핫팩'을 모아 던져주기도 했다.

평화시위 6주째… 시위대 "꽃으로도 경찰 때리지 말자"

축제가 된 '촛불 집회'

최근의 촛불집회 양상을 보면, 하나의 '문화제'로 발전해가는 모습이다. 지난 11월 26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는 가수 안치환·양희은·노브레인 등 대중적 지지를 받는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다.

거대한 무대와 화려한 조명, 멀리서도 들리도록 곳곳에 음향시설까지 배치한 촛불집회 본행사에는 11월 26일만 1억9000여만 원이 들었다. 운영비 대부분은 시민 후원금과 현장 모금으로 꾸려진다. 지난 11월 한 달간 모인 후원금은 6억2000여만 원, 이 중 5차 집회까지 5억1000만 원을 지출했다.

이와 함께 최순실 흉내 내기 등 해학과 풍자가 담긴 시민들의 퍼포먼스와 예술인들의 공연은 시위를 한 편의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켰다.

'평화·축제의 장'으로 발전한 촛불 집회
/고운호 기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엄중한 사안에 항의하는 시위 현장에서 무대와 조명을 설치하고 대중문화 공연을 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제 형식의 촛불집회는 애초 규제를 피하고자 시작됐지만, 법이 바뀐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선휴 참여연대 상임 변호사는 "예전에는 해가 진 이후의 옥외집회를 법으로 금지했지만, 문화 행사는 예외였다"면서 "시위문화도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집회 한 번에 2억, '주최측'은 누구고 비용은 어디서?

'광장 민주주의'의 역설

사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장에 많은 빚을 졌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은 광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체감됐다. 군중들의 그런 공감과 연대감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씩 밀어 올렸다.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모두 그런 공감과 연대의 장이었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빛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광장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린 2016년 11월 1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 대통령 하야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장은 대의민주주의의 무덤"이다. 그는 "광장에서 군중집회와 시위가 발생하는 빈도는 그 나라의 대의민주주의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이용될 수 있다"며 "세계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수준 높게 실천되고 있는 민주국가들은 모두가 광장에서 군중집회와 시위가 발생하는 빈도가 매우 낮은 나라들"이라고 말한다. 양 교수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날 38개 보수단체와 함께 '법치 준수' '국가 수호' 등을 외치며 대통령 하야 반대 시위를 했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든 한국의 민주주의는 변곡점에 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30년 전의 6월 민주항쟁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87년 체제'로 수렴됐듯이 이번 촛불시위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치학회장인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100만 촛불시위는 단순한 대통령 퇴진이 아닌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 변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광장 민주주의를 다시 제도권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단계"라고 말했다.

[주간조선] '광장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