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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많았던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까지 힐러리 클린턴은 거침없이 달렸다

Marine Kim 2016. 12. 7. 14:07

패기 넘치는 리더로 쉴 새 없이 달려온 '힐러리 클린턴'

우여곡절 많았던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까지 힐러리 클린턴은 거침없이 달렸다.
비록 미국의 선택은 도널드 트럼프였지만, 힐러리의 행보에 여전히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리더로서의 힐러리 이야기를 모았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 입력 : 2016.11.09 17:07 | 수정 : 2016.11.10 16:49

"힐러리는 뉴욕주(州)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었으며,
미국 대통령 자리에 역대 그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간 여성"

- 2016. 美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

영부인, 국무장관을 거쳐, 대통령에 도전했던 정치인 힐러리는 많은 이슈와 스캔들, 다양한 평가들로 연일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또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하며, 지난 6월 6일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16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 중 2위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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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힐러리는 웬만해선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힐러리의 아버지 외면은 어린 시절 아버지 휴 로댐(1993년 사망)에 대한 안 좋은 추억에서 비롯됐다고 뉴욕타임스가 2015년 7월 보도했다. 아버지는 힐러리가 전 과목 A학점을 받아왔을 때 "네가 실력 없는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할 정도로 칭찬에도 인색했다.

골수 공화당원이었던 로댐은 "진보적인 민주당은 공산당의 아류"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딸이 민주당원인 빌 클린턴과 결혼하는 게 못마땅해 결혼식장에서 신부 입장 후 한참 동안 딸의 손을 붙잡고 사위에게 인도해주지 않았다. 힐러리는 1993년 심장쇼크로 쓰러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원래 예정돼 있던 텍사스대 강연을 떠났다. 아버지는 딸의 강연 다음 날 사망했다.

힐러리의 어머니 도로시(2011년 사망)는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열네 살 때 집을 나와 식모생활을 했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고등학교까지 마쳤고, 결혼 후 첫째인 힐러리를 강인하게 키웠다. 힐러리가 네 살 때 친구에게 맞고 울면서 집에 오자 도로시는 "겁쟁이는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며 되돌려보냈다. "남자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운동이든 뭐든 관계없이 무조건 너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격려를 듣고 자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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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 정치 입문

힐러리는 매우 '정치적인 인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토론반 회원, 학급회장 등을 하면서 우등생 자리를 놓지 않았다.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늘 "정치는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힐러리는 고교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 베리 골드워터의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웰즐리대에서 '공화주의자 클럽' 동아리를 이끌었다. 그러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과 베트남전 등을 거치면서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 때 민주당원이 됐다.

웰즐리대에선 학생으로는 처음 졸업연설자로 나서 연설이 끝나고 7분여 동안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행정대 회장이던 그는 동기 여대생들에게 "아직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도력과 힘을 발휘할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힐러리는 '내부로부터 체제를 바꾸는 것이 옳다'는 신념에 따라 법과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미국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와 예일대 법대에 모두 합격했다. 전통적으로 공직 진출을 장려하는 예일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남편

예일에서 '서로에게 운명적인 상대였다'는 빌 클린턴을 만났다. 힐러리는 도서관에서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클린턴에게 먼저 다가가 자기소개를 했다. 훗날 정치 거물이 된 두 사람도 젊은 시절의 연애는 남들과 같이 열렬했다. 여름학기 중에 캘리포니아주로 일하러 간 힐러리 때문에 클린턴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따라나섰다. 클린턴이 아칸소주에서 일자리를 구하자 케임브리지에서 일하던 힐러리도 고민 끝에 아칸소로 갔다. 친구들이 "예일 법대를 나온 네가 왜 그 시골 구석에 가냐"고 뜯어말릴 때, 힐러리는 "클린턴과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클린턴은 힐러리가 지나가면서 무심코 "마음에 든다"고 한 집을 사서 힐러리에게 청혼했다. 젊은 부부에게 정치는 곧 생활이었다. 남편이 아칸소에서 하원의원, 주 검찰총장, 주지사 선거에서 당락을 거듭하며 성장해가는 동안 힐러리도 선거를 배웠다. 카터 대통령의 선거유세를 지원하러 인디애나주에 갔다가 선거본부의 나이든 남자들로부터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무시당하고 멱살을 잡힌 적도 있었다.

남편이 공직에서 일하는 동안 힐러리는 로펌에서 일하며 유능한 변호사로 인정 받았다. 돈 욕심이 없는 클린턴 대신 돈도 벌고 재테크도 했다. 남편의 정책과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힐러리는 예일대학 로스쿨 졸업 후 아칸소 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당시 명망가였던 여성 흑인 변호사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이 이끄는 어린이 보호기금(Children's Defense Fund, CDF)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CDF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힐러리는 1974년 1월부터 법사위 탄핵 조사단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1974년 가을부터는 아칸소 대학 로스쿨 강단에 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남편 빌 클린턴도 아칸소 대학 로스쿨 교수로 합류했다. 1975년 10월 1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1976년 남편이 아칸소 주 검찰총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부부는 아칸소 대학을 떠났다. 힐러리는 아칸소 주 최고의 로펌인 로즈 법률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남편이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됐고, 힐러리는 1979년 로즈 법률회사의 공동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했다.

1987~ 1991년에는 미국 변호사 협회의 여성회원 회장을 지냈다. 그동안 내셔널 로 저널(The National Law Journal)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 100인' 중 한 명으로 두 번이나 선출됐다.

1992년,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힐러리는 영부인이 되었다. 기존의 영부인들이 조용히 대통령을 내조했던 것과는 달리 힐러리는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했는데 보통 백악관 동관(East Wing)에 영부인 집무실을 두는 관례를 깨고 백악관 서관(West Wing)에 집무실을 둘 정도였다.

빌 클린턴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힐러리의 유능함을 의식해 자신을 찍으면 '하나 가격에 둘을 산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빌러리(빌+힐러리)'라는 유행어가 이때 나왔다. 이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빌과 힐러리의 공동 정부'라는 평을 받았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힐러리에게 국민 의료보험 개혁을 맡겼다. 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오바마케어'와 큰 차이 없는 국민 의료보험이지만, 당시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안을 부결시켰고, 힐러리는 비난을 받았다.

남편의 스캔들, 그 이후…
아이러니컬하게도 힐러리를 다시 끌어올린 것은 남편의 스캔들 파문이었다. 힐러리는 이러한 소문을 우익의 음모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두 사람 간 위기설이 퍼지기도 했지만 파경으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르윈스키 성추문 사건을 전후해 그가 보인 결단력 때문에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지지도가 71%까지 올랐다.

1998년 뉴욕의 상원의원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이 은퇴를 하자 출마를 결심했다. 이때부터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을 낳았다. 2000년 11월 7일 55%의 득표율로 당선돼 2001년부터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이후 그는 미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상원에서 힐러리는 예산위원회, 국방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아프가니스탄 군사 작전과 이라크 전쟁 등에 던졌는데 이는 후에 대선과정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67%의 득표를 얻으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72~74%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힐러리는 2007년 1월 20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러나 2008년 6월 경쟁자인 오바마가 과반의 대의원을 확보함에 따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경쟁 후보였던 힐러리를 새 정부의 국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힐러리는 2009년 1월 21일 미 국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 직을 반납했다.

국무장관으로서 그는 이란에 대한 강경책과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간 휴전 중재 등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무 장관 재임 시기에 개인 이메일 서버를 이용해 업무를 처리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번 대선 경선과정에서도 내내 시달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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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감 이미지 : 귀족·엘리트… "인간적 매력 부족"
힐러리는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뼈아픈 기억으로, 이번 대권 주자 도전에서는 엘리트 이미지를 벗고 친(親)서민 정책을 강조했다. 초반엔 대세론이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귀족·불통의 이미지도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작년 4월 출마 선언 때만 해도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서민' '할머니 리더십'을 내세웠다. 미니밴을 타고 1600㎞를 달려가 뉴햄프셔 주에서 처음 선거운동을 했다.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호화 강연으로 수천억원 재산을 손쉽게 모은 데 대한 비난을 의식해서였다.

하지만 그 먼 길을 달려가면서 힐러리는 단 한 번도 지역민들과 말을 섞지 않았고 6월 첫 대중 유세 전까지는 언론 인터뷰도 피했다. 압권은 기자들을 소떼 몰 듯 밧줄로 통제한 일이었다. 힐러리 캠프 홍보국장인 제니퍼 팔미에리는 "뉴햄프셔 독립기념일 퍼레이드 때 밧줄을 사용해 접근을 막은 것은 힐러리와 국민 간의 간극을 그대로 드러내는 치명타였다"고 자인했다. 이로써 마음이 아닌 말로만 '서민 코스프레(따라 하기)'를 했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뉴욕 경선을 앞둔 올해 4월에도 지하철 유세에 나섰던 힐러리는 '서민의 발' 지하철에 친숙하지 않은 모습을 들켜 이미지를 구겼다. CNN과 폴리티코 등은 힐러리가 뉴욕 지하철 탑승카드를 이용해 브롱크스 구역의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 고전했다고 보도했다. 카드를 제대로 긁지 못해 5차례나 시도한 끝에 겨우 개찰구를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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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게이트' : 가볍게 일관하다 대선 직전까지 발목 잡아
힐러리가 장관으로 일하던 4년(2009~2013년) 내내 국무부의 공식 이메일(@state.gov) 대신 서버까지 별도로 두고 개인 계정(HDR22@clintonemail.com)만으로 공무를 본 것이 문제가 됐다. '미국판 사초(史草) 실종 사건'으로 공화당은 물론이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민주당의 중진 의원까지 힐러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클린턴 전 장관에게 개인 이메일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며 "우리 정부의 정책은 투명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내 이메일이나 늘 가지고 다니는 블랙베리 휴대전화 등 모든 기록은 자동으로 보관된다"고 말했다.

개인 이메일 사용이 연방법 위반이다. 제임스 베런 전 미 국립문서보관서(NARA) 소송 담당 국장은 "모든 공직자의 이메일과 편지는 정부 기록물로, 정부 서버나 보관소에 있어야 한다. 보안 문제도 있어 개인 이메일 사용은 제한돼 있다"며 "클린턴 전 장관처럼 연방 업무에 개인 계정을 전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방송에서 잘못이 없다던 힐러리는 결국 2015년 9월 8일 AP통신 인터뷰에서 이메일 게이트에 대해 처음 사과했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 선거 직전, 연방수사국(FBI)가 이메일 게이트 재수사를 발표했고 막바지에 다다른 미국 대선 레이스를 흔들었지만 사실상 무혐의로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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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 강연료 : 20분 강연에 3억 5000만원…
힐러리의 고액 강연료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5월 19일자에 "힐러리가 마지막 유료강연 중 하나인 '이베이 서밋'에서 20분 동안 직장에서 여성의 진급 등에 대해 강연하고는 31만 5000달러(약 3억 5000만원)를 쓸어담았다"고 보도했다. 1분당 1750만원씩을 번 셈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특히 IT기업과 힐러리의 '유착'관계에 집중했다. 2014년 이후 51회의 강연을 통해 힐러리가 번 돈 1170만달러(약 128억원) 가운데 27%인 320만달러(약 35억원)가 IT기업 관련이었다고 분석했다.

기업은 강연료를 지급하고, 그 기업 CEO는 직접 힐러리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일도 많았다. 세일스포스닷컴은 지난해 두 번의 강연에 45만1000달러(약 5억원)를 지급했는데, CEO인 마크 베니오프는 힐러리를 지원하는 '레디 포 힐러리'라는 PAC(정치활동위원회)의 주요 기부자였다. 클린턴 부부에게 강연료를 준 기업·조직 72곳은 클린턴재단에 기부금도 냈다. 시스코가 대표적으로, 힐러리에게 32만5000달러의 강연료를 준 것과 별도로, 2011년 최소 100만달러(약 11억원)를 재단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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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女兒) 성폭행범 변호 과거, 뇌 손상 의혹
12세 여아 성폭행범의 유죄를 알면서도 변호해 형량을 대폭 줄여준 일을 힐러리 스스로 털어놓은 육성 녹음테이프가 2014년 6월 공개돼 논란이 됐다.

그가 변호사 초년 시절 성폭행범 토머스 앨프리드 테일러의 국선변호를 맡아 조사 절차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종신형을 받아야 할 것을 1년형으로 감형해준 사실이 있다. 여기까지는 국선변호사로서 당연한 임무로 볼 수 있지만 1980년 힐러리가 지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범행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 소녀를 공격함으로써 변호에 성공했다고 털어놓은 녹음 테이프가 공개된 것이다.

힐러리는 이에 대한 비난 여론에 방어했다. "27살때 아칸소주 페이어트빌의 로스쿨에서 법률구조 변호사로 일하다 판사에 의해 성폭행범의 변호사로 임명됐다"며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내 고객에게 최선의 능력을 쏟아 직업적 의무를 다한 것"이라며 "형법상 받아들일 수 없는 피고도 변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건강 이상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는 2012년 12월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사망한 벵가지 사태와 관련한 청문회에 출석하려고 했으나 뇌진탕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한 달을 미뤘다. 힐러리는 청문회 때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특히 렌즈에 줄무늬 홈이 있어 더욱 그랬는데, 전문가들은 뇌진탕 이후 물체가 겹쳐 보이는 복시(複視) 현상 교정용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힐러리의 '뇌 손상' 의혹이 제기 되었고, 올해 1월에도 그의 '건강 이상설'이 다시 퍼졌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힐러리가 연설을 마치고 나서 방향 감각을 잃어 거의 쓰러질 것 같았고, 안색이 매우 창백해졌고, 땀에 흠뻑 젖은 적도 있었다" 는 등의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힐러리 측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는 주치의 소견을 이미 지난해 7월 받았다"며 건강 이상설을 일축했다.

"뇌 손상 겪은 사람이 쓰는 뿔테 안경 2년 前 왜 썼나"
힐러리 뇌진탕 재발說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힐러리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전 대통령 남편과 엄마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딸부터 시작해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인연을 맺어온 인사들과의 화려한 인맥 또한 자랑한다.


정치 잠룡들의 크고 작은 대결 이후, 민주당 대권 주자가 되고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의지를 다졌던 힐러리,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여전히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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