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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총독에 폭탄 던진 '65세의 백발 투사' 강우규(姜宇奎)

Marine Kim 2016. 12. 7. 13:55

日총독에 폭탄 던진 '65세의 백발 투사' 강우규(姜宇奎)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 그동안 몰랐던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 이번 편은 노년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투사의 이야기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 입력 : 2016.11.16 08:18 | 수정 : 2016.11.16 20:30

강우규 의사(義士)는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강우규,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강우규 의사는,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지만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라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젊은 시절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차 개화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기독교 장로교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이 생겨 1883년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했다. 강 의사는 홍원에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인술(仁術)을 베풀면서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다.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의사의 계몽운동 활동은 을사늑약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감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 선생의 영향이 컸다.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의사는 이동휘 선생과 친교가 있었다. 그리고 이동휘 선생의 구국운동론에 감화되어 교육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이동휘 선생을 만났던 1909년,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55세였다.)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훗날 연해주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한인 마을 '신흥동'과 광동학교 세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일대의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렇게 되자 의사는 1915년 지린성 라오허현(吉林省 饶河县·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로, 평소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던 의사가 눈여겨보아 둔 곳이었다.

의사는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의 한인 마을로 성장했고, 이를 기반으로 크게 세 가지 일을 추진했다.

첫째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 둘째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기독교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는 일, 셋째는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신흥동을 만드는 일이었다.

* 노령(露領): 러시아의 영토. 시베리아 일대를 이른다.

그런 가운데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레닌 정부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공언했다. 특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 속에 국제사회에는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가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를 파악하고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일으킨 것이 1919년 3·1운동이었다.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은 해외로도 퍼져나가 만주·노령·미주·일본 등 한인 동포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강 의사가 건설한 북만주의 신흥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광동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라오허현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좀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고심
그러나 그는 만세 시위운동 외의 다른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했다. 이동휘 선생이 활동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의사는 여기에서 3월 26일 이동휘 선생의 부친 이승교와 김치보·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라오허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한다. 노인동맹단은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결성된 단체로, 주요 활동 방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방식의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있던 의사는 이 같은 독립운동 방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구나 정세는 점차 비관적으로 바뀌어 세계 열강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고, 3·1운동은 그해 5월을 넘기며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일제는 이런 상황 변화를 이용해 조선총독을 교체하고,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는 술수를 꾀하려고 했다. 그래서 무단정치의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려 했다. 한반도를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는 이러한 술책에 의사는 새로운 조선총독의 처단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긴요한 때를 대비해 사두었던 폭탄으로 거사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눈을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오는 방법으로, 6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원산항에 도착해 시내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의사는 동지 최자남과 허형의 도움으로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해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서 가지고 다니며, 그의 얼굴을 익혔다. 사이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겨, 매일 역전에 나가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65세의 노인,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다
거사 당일인 9월 2일 아침, 의사는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뒤,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형과 함께 남대문 밖 중국 요리점에서 점심을 같이한 뒤, 단신으로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다. 마침내 사이토 일행이 오후 5시 남대문역에 도착했고, 그는 환영 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마차 7보 전에 터져 불기둥이 일고 굉음과 함께 땅이 깊이 패었다. 마차 주위에 중경상자가 즐비했지만 총독 부부의 마차는 광장을 빠져나갔다. 파편 몇 개가 마차에 명중하고 1개는 마차 뒤쪽 관통해 총독 가죽 허리띠를 약간 손상시켰다. 경성특파원 등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의거 직후 군중의 틈을 빠져 나왔던 의사는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한국인 순사 김태석에게 잡혔다. 일제의 법정에 선 그의 의연한 태도에, 처음에는 '피고'라고 부르던 일본인 판사는 의사의 인격에 압도되어 '강선생'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강 의사는 결국,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이후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다.
(왼쪽) 매일신보 1919년 10월 7일자의 강우규 의사 피체 기사. "투탄 진정범인 강우규 체포"라는 제목으로 의사의 사진과 함께 의사가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가운데) 매일신보 1920년 2월 27일자에 실린 강우규 의사가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모습, (오른쪽) 같은 해 5월 2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선생의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기사.'강우규는 결국 사형'이라는 제목이다.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그의 항소는 같이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동지 최자남·허형·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사는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아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형 확정 뒤에도 그는 매일 성경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의연하게 마지막 날을 기다리다, 옥바라지를 하던 아들 중건에게 유언을 남겼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의사는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아래와 같은 짤막한 시를 남기고 순국했다.

강우규 의사 동상에 씌여 있는 유시(遺詩) /고운호 객원기자

강우규, 목숨을 바친 애국(愛國)

(참고=국가보훈처)


강우규, 후대의 이야기

서울역 강우규 의사 동상
서울역 광장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 /고운호 객원기자
지금의 서울역 대기실 앞은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벌인 곳으로 1986년 설치된 기념 표석이 있다. 2011년에는 의거 92주년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해마다 의사의 추모식이 진행된다.
폭탄 투척 모습 그대로… 강우규 의사 동상 서울역에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었던 곳이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렀는데,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 데 이어 구치소의 제9~13옥사·중앙사·나병사·지하옥사 등 8천여 평과 담장 일부·망루 2곳을 원형대로 되살려 1996년 유료공원화하기로 하였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있다.
[만물상] '서대문형무소'의 前 일본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