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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을 고소했다./TV조선 뉴스화면 캡처 |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17일 특검에 소환됐다. 일생을 양지에서만 살았다고 알려진 그에게도 암흑기는 있었다.
김기춘 일생의 암흑기는 5공 시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김기춘의 후원자나 같았던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도 사라진 것은 물론, 중정을 견제했던 보안사 출신 12.12세력들이 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중정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주도권을 잡았는데, 1977년 창설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중정에겐 눈엣가시였다. 중정은 보안사에 대해 조직을 축소하고 감사를 강화하는 등 강하게 통제하려고 했고 결국 보안사측이 중정을 적대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김기춘은 허화평 등 보안사 출신과는 원수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기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지 1979년 초까지 중정 대공수사국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1979년 1월 중정을 떠난다. 신직수가 청와대 법률담당 특보로 임명되면서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차출된 것이다. 신직수는1976년 중정부장직을 김재규에게 넘기고 변호사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3년만에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김기춘을 다시 데려갔다. 10.26 후 보안사는 ‘암살자(김재규)의 산실’이라며 중정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지만, 김기춘은 이 사태에서 비켜갈 수 있었다.
김기춘은 1980년 6월 대검 특수부1과장으로 친정인 검찰로 복귀했다. 유신시절 최고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새로 정권을 잡은 허화평 등 보안사 출신들의 방해로 한직으로 돌게 됐다. 김기춘은 1981년 경남고 선배인 정치근 전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이 되면서 재기할 기회를 노린다. 한직인 출입국관리국장에서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검찰국장으로 임명받은 것이다.
그러나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정치근 장관이 물러나면서 김기춘도 힘을 잃었고, 대통령 인척(장영자)이 연계된 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났다. 김기춘은 중정 출신인 이철희를 나름 보호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장영자-이철희 사건’이라고 브리핑했는데, 신문을 본 전두환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모든 걸 이철희가 했지 아녀자인 장영자가 했겠느냐, 누가 이런 식으로 언론에 얘기했냐”며 화를 냈다는 소식은 즉시 법무부와 검찰에 알려져 이 사건 이름은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수정됐다.
이후 김기춘은 한직인 법무연수원으로 발령, 4년을 지내게 된다. 1985~1987년에는 대구지검 검사장, 대구고검 검사장, 법무연수원 원장 등으로 ‘조용히’ 지냈다. 일각에서는 “5공 당시 서동권, 박철언 등 TK(대구경북)가 검찰을 장악하고 있어 PK(부산경남)인 김기춘이 주요 자리에 앉기 힘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88년 2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사회 각 분야가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게 되자 5공 시절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 각계에서 발탁된다. 김기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검찰총장 임기제(2년)를 신설했는데 그 첫 인물이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은 취임 직후 5공비리 특별수사부를 발족해 장세동, 이학봉 등 5공 실력자들을 무더기로 구속시켰다. 이후 그는 법무부장관, 국회의원(3선),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치며 권력의 정점에 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