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 꼬집고 비틀고… 정치 개그가 돌아왔다
#1 주황색 렌즈의 선글라스를 낀 채 수의를 입은 여성이 교도관에 의해 호송된다. 최순실의 특검 출두와 똑같은 모습. 느닷없이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억울해요. 어떻게 애들까지”라는 말을 남긴 채 무대 뒤편으로 끌려간다. ―지난달 29일, KBS2 ‘개그콘서트(개콘)’
#2 재밌게 본 영화라며 자연스럽게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을 소개한다. “왕이 연설을 잘 못해. 그래서 다른 애가 연설하는 것을 도와줘요. 연설문을 고쳐주고….” 정치적인 발언 아니냐는 질문에 “이게 왜 정치적이냐. 영화 실제 내용이다”라고 되받아 말한다.
―지난해 11월 16일,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
최근 국내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SBS 웃찾사와 KBS 개콘에서 다룬 정치 풍자 코너의 한 장면이다. TV 화면에서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풍자’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부터다. 올해 2월 현재 개콘과 웃찾사의 정치 풍자 코너는 3, 4개로 전체 분량의 20∼30%에 이른다.
이에 일부에선 ‘풍자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풍자의 수준이 ‘패러디’식 따라 하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계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른 정치 풍자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최순실 정국 등에 업고 흥행카드 된 ‘풍자’
최근 풍자를 다룬 코미디 코너가 증가한 가장 큰 이유는 풍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웃찾사의 기획·연출을 담당하는 SBS 안철호 PD는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를 모티브로 해 신설한 ‘개그청문회’의 시청률이 전체 코너 중 1, 2위를 기록한다”며 “풍자를 의도적으로 강화했다기보다 시청자들이 가장 원하는 개그 소재를 찾아내는 코미디언들의 감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풍자 코너는 인터넷 등에서 더 크게 화제를 모으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1월 ‘연설물 유출 논란’을 풍자한 SBS 웃찾사의 ‘살점’은 다음 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100만 건이 넘는 재생 횟수를 기록했다. SBS 관계자는 “‘반응이 좋다’는 기준으로 계산되는 재생 횟수가 보통 수만 건으로 100만 건은 초대박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미 소개됐던 내용이 ‘역주행’해 인기를 끌기도 한다. 개그맨 최국은 지난해 4월 ‘대통령은 내 친구’라는 코너에서 “대통령이 친하다고 해서 청와대에 함부로 친구를 데려오고 그러겠냐”는 풍자를 선보였다.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인터넷에선 “최국은 알고 있었다”라는 글과 함께 뒤늦게 인기를 끌었다. 이에 지난해 11월 이 코너가 부활했다. 안 PD는 “최순실 사태 전에도 풍자를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라며 “코미디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정국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풍자 아닌 패러디만 넘치는 현실
하지만 최근 소개되고 있는 풍자가 양적으로 증가했을 뿐 질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tvN SNL에선 배우 김민교가 최순실의 복장인 선글라스와 흰 셔츠를 입고 나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외모 따라 하기 외에 다른 풍자적 요소는 없었다. 다른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 독일, 승마 등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단어를 일부 변형하거나 “이러려고 했는지 자괴감이 든다”와 같은 논란적인 발언을 비꼬는 경우가 대다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풍자는 직설적인 표현은 강해졌지만 공감이나 신선함은 떨어진다”며 “무릎을 칠 만한 위트와 재치가 담긴 방향으로 풍자의 변화를 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치 풍자는 난도가 높은 개그 소재로 여겨진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이슈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코미디의 풍자 역량 자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시국에 편승해서 ‘남들도 하니까’ 따라 하는 식의 모방만 반복되는 형국”이라며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짚는다거나 새로운 해석이 결여돼 있다 보니 식상하고 반복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의 코미디언들 역시 현재 진행되는 풍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코미디언 황현희는 “정치 풍자를 자주 선보이고 있지만 여론을 선도한다는 느낌보단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만족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반성을 한다”며 “한국 정치 풍자에 획을 그었던 김형곤 김병조 선배처럼 꼼꼼한 취재와 재치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풍자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인 방송의 증가 등 대중문화의 중심축이 과거 연예인·방송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시대 흐름과도 맞물려 앞으로 방송계에서 풍자가 자리 잡긴 힘들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기가 막힌 패러디 작품들이 오히려 사회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며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현실에서 심도 깊은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풍자 없이는 TV에서 풍자 개그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풍자에 너그러운 자세 가져야
이처럼 한국 코미디계에서 풍자가 부실해진 데에는 정부의 제약도 크게 작용했다. 정권을 비판하는 풍자 프로그램에 대해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란은 박근혜 정부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2013년 tvN SNL의 인기 풍자 코너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채 4개월이 되지 않아 돌연 폐지됐다. 또 2015년 발생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당시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풍자를 통해 ‘품위를 손상’하고 ‘객관성을 위반’했다며 KBS 개그콘서트의 ‘민상토론’ 코너와 MBC 무한도전에 행정지도를 내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코미디언의 자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코미디 풍자에 대한 제약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촛불 민심이 보여준 것 중 하나가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하라는 것”이라며 “힘들게 찾아온 풍자 코미디가 지속되려면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문화가 저변에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2 재밌게 본 영화라며 자연스럽게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을 소개한다. “왕이 연설을 잘 못해. 그래서 다른 애가 연설하는 것을 도와줘요. 연설문을 고쳐주고….” 정치적인 발언 아니냐는 질문에 “이게 왜 정치적이냐. 영화 실제 내용이다”라고 되받아 말한다.
―지난해 11월 16일,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
최근 국내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SBS 웃찾사와 KBS 개콘에서 다룬 정치 풍자 코너의 한 장면이다. TV 화면에서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풍자’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부터다. 올해 2월 현재 개콘과 웃찾사의 정치 풍자 코너는 3, 4개로 전체 분량의 20∼30%에 이른다.
이에 일부에선 ‘풍자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풍자의 수준이 ‘패러디’식 따라 하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계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른 정치 풍자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최순실 정국 등에 업고 흥행카드 된 ‘풍자’
최근 풍자를 다룬 코미디 코너가 증가한 가장 큰 이유는 풍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웃찾사의 기획·연출을 담당하는 SBS 안철호 PD는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를 모티브로 해 신설한 ‘개그청문회’의 시청률이 전체 코너 중 1, 2위를 기록한다”며 “풍자를 의도적으로 강화했다기보다 시청자들이 가장 원하는 개그 소재를 찾아내는 코미디언들의 감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풍자 코너는 인터넷 등에서 더 크게 화제를 모으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1월 ‘연설물 유출 논란’을 풍자한 SBS 웃찾사의 ‘살점’은 다음 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100만 건이 넘는 재생 횟수를 기록했다. SBS 관계자는 “‘반응이 좋다’는 기준으로 계산되는 재생 횟수가 보통 수만 건으로 100만 건은 초대박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미 소개됐던 내용이 ‘역주행’해 인기를 끌기도 한다. 개그맨 최국은 지난해 4월 ‘대통령은 내 친구’라는 코너에서 “대통령이 친하다고 해서 청와대에 함부로 친구를 데려오고 그러겠냐”는 풍자를 선보였다.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인터넷에선 “최국은 알고 있었다”라는 글과 함께 뒤늦게 인기를 끌었다. 이에 지난해 11월 이 코너가 부활했다. 안 PD는 “최순실 사태 전에도 풍자를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라며 “코미디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정국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풍자 아닌 패러디만 넘치는 현실
하지만 최근 소개되고 있는 풍자가 양적으로 증가했을 뿐 질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tvN SNL에선 배우 김민교가 최순실의 복장인 선글라스와 흰 셔츠를 입고 나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외모 따라 하기 외에 다른 풍자적 요소는 없었다. 다른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 독일, 승마 등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단어를 일부 변형하거나 “이러려고 했는지 자괴감이 든다”와 같은 논란적인 발언을 비꼬는 경우가 대다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풍자는 직설적인 표현은 강해졌지만 공감이나 신선함은 떨어진다”며 “무릎을 칠 만한 위트와 재치가 담긴 방향으로 풍자의 변화를 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치 풍자는 난도가 높은 개그 소재로 여겨진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이슈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코미디의 풍자 역량 자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시국에 편승해서 ‘남들도 하니까’ 따라 하는 식의 모방만 반복되는 형국”이라며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짚는다거나 새로운 해석이 결여돼 있다 보니 식상하고 반복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의 코미디언들 역시 현재 진행되는 풍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코미디언 황현희는 “정치 풍자를 자주 선보이고 있지만 여론을 선도한다는 느낌보단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만족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반성을 한다”며 “한국 정치 풍자에 획을 그었던 김형곤 김병조 선배처럼 꼼꼼한 취재와 재치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풍자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인 방송의 증가 등 대중문화의 중심축이 과거 연예인·방송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시대 흐름과도 맞물려 앞으로 방송계에서 풍자가 자리 잡긴 힘들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기가 막힌 패러디 작품들이 오히려 사회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며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현실에서 심도 깊은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풍자 없이는 TV에서 풍자 개그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풍자에 너그러운 자세 가져야
이처럼 한국 코미디계에서 풍자가 부실해진 데에는 정부의 제약도 크게 작용했다. 정권을 비판하는 풍자 프로그램에 대해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란은 박근혜 정부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2013년 tvN SNL의 인기 풍자 코너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채 4개월이 되지 않아 돌연 폐지됐다. 또 2015년 발생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당시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풍자를 통해 ‘품위를 손상’하고 ‘객관성을 위반’했다며 KBS 개그콘서트의 ‘민상토론’ 코너와 MBC 무한도전에 행정지도를 내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코미디언의 자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코미디 풍자에 대한 제약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촛불 민심이 보여준 것 중 하나가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하라는 것”이라며 “힘들게 찾아온 풍자 코미디가 지속되려면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문화가 저변에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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