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교회 읽기] 나환자들의 사도 성 다미안과 소설가 스티븐슨의 인연
‘다미안 드 베스테르’라는 정식 이름으로 부르면 어딘가 낯설지만, ‘나병환자들의 사도’라는 별칭과 함께 ‘다미안’이라 부르면 이내 알 수 있는 성인이 있다.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했다.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하던 이 수도회는 1825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하와이 군도의 섬들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수도명을 다미안으로 선택한 그는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1863년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 선교를 자원했다. 이듬해에 하와이로 간 다미안은 5월에 호놀룰루에서 사제품을 받고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성당을 짓고 용암으로 뒤덮인 섬을 돌아다니면서 원주민들의 인습을 극복해 가며 그리스도를 전했다.
마침 하와이 군도에 나병에 걸린 이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1865년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나병환자들은 몰로카이 섬에 격리되었다. 이 섬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의 나이로 스스로 원하여 그곳으로 건너갔다. 700명이 넘는 나환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 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환부의 고름을 짜주고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 주었다. 그런 가운데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또한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냉랭하던 환자들이 차츰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1885년에는 다미안 자신이 나병에 감염되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계속 나환자들을 보살폈다.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1889년 4월15일 세상을 떠났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시복되고 2009년에 시성되었다. 성인의 축일은 처음에는 선종일인 4월15일이었으나 이날이 종종 사순시기와 겹친다는 미국 교회의 요청에 따라 5월10일로 변경되었다.
나환자 돌보다 나병에 걸려 선종했으나 뜻밖의 구설
성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사뭇 감동적이다. 나병은 신경을 마비시키고 갉아먹는 질병이다. 한센병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질병을 당시 사람들은 즉각 전염되는 병으로 여겼다. 그리고 성경에서 보듯이,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도덕적 잘못에 대한 징벌로 여겼다. 그러니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야말로 절망에 빠져 외로운 가운데 살아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다미안 신부는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온몸을 바쳐 영적, 의료적으로 보살폈다. 그들과 더불어 지내는 데 전혀 거리를 두지도, 두려움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는 그들과 같은 병에 걸려서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이렇듯 숭고한 삶과 정신은 입이 닳도록 칭송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다미안 신부는 뜻밖에도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좋지 않은 구설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 개인에게 혹은 가톨릭교회에 우호적이지 않던 한 개신교 선교사가 엉뚱한 얘기를 퍼뜨린 탓이다. 그는 심지어는 성 추문까지 들먹였다. 다미안 신부가 나병에 걸린 것은 조심성 없이 원주민 여성들과 잠자리를 같이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다미안 신부의 좋던 평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이드라는 장로교회 목사가 있었다. 그 역시 다미안 신부와 같은 시대에 몰로카이 섬에서 원주민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다미안 신부가 왜 그리 못마땅했을까? 다미안 신부는 몰로카이 섬에 격리된 나병환자들의 삶터에서 나병환자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곳에서 자신도 나병에 걸려 마침내 쓰러질 때까지 그들에게 봉사했다. 그런데 하이드 목사는 몰로카이 섬에서 아마도 그렇게 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이드 목사 자신도 다미안 신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또한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을 텐데도 다미안 신부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미안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 자신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이드 목사는 어떤 장로교 신자에게 사적인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냈다. 그 편지에서 그는 다미안 신부를 두고 “거칠고 지저분하며, 고집이 세고 편견이 심한 사람인데다 원주민 여인들과 놀아나다가 나병에 걸릴 정도로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적인 편지는 이내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여러모로 나약하였으나 실제로는 영웅
마침내 저명한 작가 한 사람도 이 편지에 관한 얘기를 신문에서 읽고 알게 되었다. 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었다.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같은 작품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다. 자신이 장로교 신자였던 스티븐슨은 전에 다미안 신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얘기가 미심쩍어 다미안 신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몰로카이 섬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다미안 신부를 알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대화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는 진실을 찾아냈다. 결론 삼아서 ‘여러 모로 나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는 영웅’인 한 사람의 이미지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 성 다미안 동상 - 하와이 주의회 의사당.
그가 찾아낸 진실은 이러하다. 다미안 신부는 그 섬에서 제2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이 한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 일생을 나병환자들을 위해 바쳤고, 그뿐 아니라 자신도 죽으면 그들과 함께 묻히기를 원하고 그렇게 해달라고까지 부탁했다는 것이다. 다미안 신부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하면서 그곳에 누워 있는 인생 끝자락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존엄하게 대해 준 첫 사람이었다.”고 스티븐슨은 증언했다.
스티븐슨은 1890년에 이 증언이 담긴 글을 ‘호놀룰루의 하이드 목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발표했다. 꽤나 긴 분량으로 하이드 목사를 엄중하고 단호하게 비판한 편지였다. 수신인이 스티븐슨이 이 편지를 쓰기 몇 해 전에 발표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하이드라는 사실이 공교롭기는 하다.
그리고 그 편지는 다미안 신부의 시복을 위한 절차를 밟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이드 목사가 ‘악마의 변론자’였다면, 스티븐슨은 ‘하느님의 변론자’였다고나 할까. 지난날의 사정이나 곡절이야 어떠했든, 지금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하와이 주 의회 의사당에는 하와이 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성 다미안의 동상이 서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5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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