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5]

Marine Kim 2021. 1. 2. 10:34

Marine story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5]

 

280230,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 남 등 세 방향에서 F중대를 공격해 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들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중 27)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써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말았다. 이 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 왔다.

 

이때 2소대의 '카페라다' 일등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10명 이상을 쏘아 넘어뜨렸을 때 소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소총을 달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호 속에 넘어져 있던 부상병이 장전된 소총을 건네 주었고, 그는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렸을 뿐 아니라 또한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돌려 던지고 발길을 차내면서 분전했다.

 

새로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끊임없이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하는 중공군 병사와 이를 되받아 던지며 분전하는 해병대원 간의 치열한 근접전투가 도처에서 전개되었는데, 해병들은 더 이상 중공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다시 진지 남쪽의 도로방향으로부터 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0mm박격포반의 반장 이하 10명을 살상하고 중대지휘소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휘소와 박격포를 경사면위로 이동시켰다.도로방면에서 경사면을 올라오며 공격하는 중공군에 대해서는 미리 배치한 중기관총사격과 수류탄으로 저지했다. 60mm81mm박격포반의 하사관들이 모두 전사 또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박격포는 일등병이 통합지휘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적탄을 무릅쓰고 각 병사들의 진지로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대원을 격려했다. 동측방에 위치하고 있던 1소대는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270도 정면에서 펼쳐진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날이 밝자 1소대는 그 주력으로써 산정을 향해 역습을 실시하여 본래의 저항선을 회복했다.

 

0630분경에 전투는 거의 끝났는데, 그때까지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의 유기시체는 약 450구나 되었다. 이 무렵 중대의 수류탄 보유량은 극히 소량이었고 박격포탄도 10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는 해병들의 사상자와 중공군 전사자가 가졌던 화기탄약수류탄을 주워 모으는 한편,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를 모두 천막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아서 수용하고 교대로 난방시설이 된 천막에 들어가게 했다. 위생병은 몰핀(진통제) 주사약을 입에 물고 녹여 가면서 부상자 구호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혈액이 얼어서 수혈을 못 해 구제되지 못한 부상자도 있었다.

 

오후 늦게 해병대의 R5D기가 박격포 탄약과 위생기구를 공중투하했으나 진지밖에 떨어진 탄약도 많았다. 주변의 고지에 대해서는 '코르세아기'에 의한 지상공격과 '하갈우리'로부터 포병의 엄호사격이 실시되었다.

 

28일에는 '하갈우리''유담리'로부터 F중대에 대한 증원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중공군부대에 의해서 차단되어 '덕동고개'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28일 밤, F중대의 배치는 전날 밤과 같았으나 진지에 배치된 인원수는 30%나 줄어 있었다.

 

'하갈우리'의 포병은 밤 중에 F중대진지 주변의 중공군에 대해서 요란사격을 가했고, 81mm박격포는 진지 동북방의 바위산에 , 60mm 박격포는 진지 북방의 안부에 대해서 사격을 가했다.주간에 철수하여 재편성을 실시하고 있던 중공군 제59사단은 일몰후 다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2230분경, '하갈우리'방면에서 격렬한 포성이 들려 왔다. 중공군 제58사단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90215, 중공군의 한 부대가 북쪽의 3소대에 대하여 박격포사격을 가한 후 공격해 왔다. 이어서 서북측과 서측 정면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40명 내지 50명의 중공군이 북쪽의 3소대진지를 돌파하여 진내에 돌입해 왔다.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모여서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때 해병들은 경기관총을 후방으로 돌려 이들을 순식 간에 섬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박이 강해서 1선부대는 20m 정도 철수했다. 중대장은 왼쪽 무릎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부하의 부축을 받아 앉은 채로 지휘를 계속했다.

 

20일 아침, 3소대는 역습으로 주저항선을 탈환했다. 전날 밤의 손실은 해병측이 전사 5·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측의 전사자는 200명 이상이었다. 날이 밝은 후 F중대는 진지 주위에 낙하산을 돌려 놓아 표시를 했다. 해병대 수송기는 이것을 표적 삼아 정확한 투하로 탄약 등을 보급했다.

 

미 해병 제6관측기인 헬리콥터가 SCR-300SCR-619 무전기의 건전지를 투하했는데 동체와 기수에 총격을 받았다. 공군의 C-119'훌라잉 박스'에서 투하된 보급품은 진지 서방 500m 지점에 떨어졌으나 낮에는 적의 사격 때문에 회수할 수가 없어서 밤에 포병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회수했다. 이렇게 하여 박격포의 탄약수류탄,·C-Ration,·커피 등을 수령했다. 모포와 들것도 보내 왔기 때문에 중상자들을 땅 위에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 C-119'훌라잉 박스': 쌍발·쌍동의 중형 수송기, 1947년 초 취항, 적재능력 13.6, 62명 수송 가능, 주로 공수부대 작전용

 

 

그날 오후 중대장은 분대장 이상을 모아 다음의 훈시를 했다. "'유담리'의 제5 및 제7연대는 포위되어 격전 중에 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8일 밤, '하갈우리'진지도 강력한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고토리'와 차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중대가 증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전방에 매설하여 진지를 강화하라. 우리는 해병대답게 싸운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29일 밤은 조용했으나, 3002시경, 중공군이 영어로 소리를 쳤다. "F중대 제군은 포위되어 있다....중공군은 따뜻한 옷을 주고 잘 대우한다. 즉시 항복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중대는 그 대답으로 박격포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30분후 약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착검을 하고 도로의 남쪽으로부터 돌격해 왔다. 중대는 주간의 공중보급 덕분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격포로 조명하고 기관총사격과 105mm곡사포의 시한탄사격, 그리고 수류탄투척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30, 헬기콥터가 무전기의 건전지를 가져 왔고, 수송기가 탄약 등을 공중 보급했다. 중대는 처음으로 예비탄약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저녁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4시간 사이에 78센티미터가 쌓였다. 중공군은 4정의 기관총을 '사북방' 바위산에 거치하여 밤 중인 01시가 좀 지나 사격을 가해 왔다.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을 하면서 105mm포로 사격을 했는데 다행히 처음에 사격한 포탄 4발이 명중하여 일거에 중공군을 격멸했다.

 

121, 중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의 긴장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대지역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쓰레기와 깡통은 파묻고 부상자의 장비는 한곳에 모아 정돈하였으며, 전사자의 시체는 나란히 누이고 모포로 덮었다. 척후를 북방으로 내보냈으나 중공군의 사격으로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항공기와 박격포의 간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호 속에서 이 공격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121일 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장거리포 사격을 가해 올 뿐 별다른 공격은 없었다. 이날 밤 '유담리'로부터 1개 대대(7연대제1대대)가 대대장의 지휘하에 쌓인 눈을 밟으며 적 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2일 아침, 구원대대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필요하다면 안내병력을 내보내겠다는 뜻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1대대장은 그 기분을 이해하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응답해왔다. 21125, 1대대는 F 중대의 진지에 도착하여 중대를 구원했다.

 

F중대는 5일 동안 밤낮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불과 240명으로서 중공 제59사단의 맹공을 견뎌 냈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F중대의 피해는 약 47%로서 전사 26·부상 89, 행방불명 3명이었으며 특히 장교 7명 중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장교는 1명뿐이었다. F중대 진전에서 발견된 중공군이 유기한 시체는 1,500구에 달했다.

 

F중대는 덕동고개를 고수함으로써 약 1주일간 중공 제59사단의 주력 2개 연대를 끌어들여 '유담리'진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우세만을 믿고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로 이 작은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용감하게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끝내 돌파할 수가 없었다. F중대가 최후까지 건재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중대장 '바아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 적절한 지휘, 전대원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 필승의 신념, ··항공의 효과적인 화력지원의 협조체제, 및 충분한 보급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더욱이 '바아버' 대위와 '카페라다' 일등병에게는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계속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 by oldmarine (사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