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3]

Marine Kim 2021. 1. 2. 10:32

Marine story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3]

 

6. 한국 해병대(K.M.C.)의 혈맹 형제해병대, 미 해병대(Brother Marine U.S.M.C.)

 

우리는 형제 해병대(Brother Marine이라고 한국전쟁 중 우리는 서로 이렇게 불렀음)인 미 해병 제1사단의 한국전쟁 중의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희생이 어떠하였음을 이 내용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들을 통하여 다시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들이 본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이국땅, 한국에서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산침략군에 대항하여 우리와 함께 싸운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 해병대는 한국전쟁 중 대부분의 전투기간을 미 해병대와 함께,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서 전투하면서 미군들과 똑같은 장비에, 같은 군수물자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시는 항상 충분한 화력지원뿐만 아니라 군수지원도 충분했기 때문에 해병들의 사기는 항상 충천되어 있었고 따라서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해병대를 강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로도 생각된다.

 

물론 거기에는 피나는,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으로 단련된 정신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건한 체력을 빼어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전투 환경과 조건 등이 한국 해병대가 "무적해병대", "귀신잡는 해병대""라고 호칭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한국 해병 제1연대

 

1951년대 초에 한국 육군에 배속되어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전투하고 있었을 때의 해병 제1연대의 해병들은 강원도의 혹한을 먼저 염려하여야 했다. 후방지원이 원활하지 않아서 우리는 식사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어야했고 그때의 우리, 해병들의 모습은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의 우리의 복장상태는 순거지였다. 그런 상태에서는 전투하는 것보다 먹고 생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 훗날에 그 어려웠던 때를 회상해 보니 그 당시의 한국 육군의 전투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특기할 사실은 그로 인하여, 충분한 군수물자지원과 화력지원 등의 지원으로 우리는 195164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가 최초 가원도 '인제'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도솔산"공격목표에 대한 공격 중 인민군의 험준한 고지형을 이용한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초기에 발생한 막대한 피해(500)로 인하여 부대를 재편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우리, 그들의 형제해병대인 해병 제1연대가 그들과 교대하여 10여 일 간의 혈투로 많은 해병들의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한 희생을 감수면서 "도솔산"공격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들의 감투정신은 선배해병들을 통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후의 '장단, 사천강지역'에서의, 특히 전초진지에서의 혈전에서는 미 해병대의 화력지원 특히 근접항공지원은 중공군의 개미떼같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에 대항하여 전투해야했던 우리, 해병들의 전투의식에 무엇보다 큰 보탬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해병뿐만 이 나라의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해병정신과 해병대 전통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병정신""해병대 전통"은 이런 선배해병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으며 또한 이루어져 가고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해병들은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19501127일부터 1211일까지의 2주 간 북한 지역의 함경남도 '흥남' 북쪽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지역까지 진출한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이 중공군(120.000)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항'까지 철수 중의 힘들고 어려웠던, 많은 희생자 발생, 장면 등을 그 당시 참전했던 미 해병대 장병 및 종군기자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로서 그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장진호"는 장진강(長津江)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Reservoir)이 다.

 

'하갈우리'의 간이활주로(공사진척 40%) 물자수송 및 부상자후송에 사용됨 - 1950.12.6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에 동체착륙한 미 해병대 수송기(C-47) 승무원은 무사했음.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지역에서 지원포 사격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미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 진입과 동시에 전투의 계속을 위해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한 수송기 이착륙장의 절대 필요에 의거 '장진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26일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에 의거 철수하게 되어 공사진척이 40%정도인 '하갈우리' 활주로를 이용하여 C-47수송기편에 부상자 4,300여 명을 후송하였다. 이때 '장진호' 남쪽끝 일대 지역에는 약 10.000여 명의 병력과 UN구에 협력한 1.500여 명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매우 혼잡하였다.

 

'흥남'부두에서의 철수(1950.12)

'흥남'부두를 통하여 미 해군함정 및 선박들이 군병력외에 북한의 피난민 100.000명을 남한으로 후송하였다.

 

. "장진호(長津湖) 전투"의 영웅: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7연대 제1대대장)

 

1915113일 조지아 주 피츠제럴드에서 태어난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1938년 조지아공대를 졸업 후 ROTC장교로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나 사임하고 해병대소위로 임관하여 미 해병대의 Basic School에 입교하여 해병대생활을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과달카날''펠릴리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의 소대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의 수훈으로 1952년 전쟁 기간 중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The Congressional Medal of Honor)"'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군은 해병 제3사단을 지휘하여 1969"수훈훈장" 등 총 20여개의 훈장을 수여받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 참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제1사단 소속의 중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데이비스' 대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당시 중령이었던 '데이비스' 대장은 1950821일 아침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 캘리포니아주 Camp Pendleton에서 출두명령을 받았다.

 

출두명령 2시간 후 미 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대요원은 불과 수명밖에 없었고, 대대 막사로 예정된 전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비스' 중령은 기간요원을 모아놓고 대대장으로서의 첫 번째 훈시를 하게 되었는 데 그의 훈시내용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개 대대를 편성하는 데 1주일 여유밖에 없다. 우리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원의 60%는 예비역이다. 그 중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역전의 용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험 없는 예비역이다. 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결과가 된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그 24시간을 전부 사용하여야 한다".

 

이후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는 1개월 후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19501224,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 제9병단이 은밀히 '장진호' 일대에 진입해 있었다. 중공군의 제9병단은 미 해병 제 1사단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뒤늦게 사지에 들어왔음을 알게 된 미 해병 제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전투과정을 "장진호 전투"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중공군과 미 해병대의 병력대치 규모는 10 : 1로서 중공군이 절대 우세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 중령은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고립된 제2대대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작전을 감행하여 전멸위기에 있던 F 중대를 구출하였다.

 

계속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 by oldmarine (사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