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6]

Marine Kim 2021. 1. 2. 10:35

Marine story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6]

 

이 작전은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이 성공적으로 1950'흥남'철수를 실시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악통로를 개통시켰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Cohen 군목(대위)은 장교들이 중공군과의 격전 중에 전부 쓸어진 것을 보고 행정요원들을 모아 마지막 역습 돌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에게 점령된 고지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미 해병 제1사단은 결사적으로 포위 추격하는 중공군과 매서운 추위(낮에는 -20도 밤에는 -32), 그리고 엄혹한 굶주림 속에서 상당수의 대원을 잃고 간신히 '흥남'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100.000여 명의 북한 피난민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미 해군의 함정과 선박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장성 아들들

 

"장진호 전투"에 미 해병 제1비행사단장 '피일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 '해리스' 중령도 참전했었는 데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한국전쟁 중 미군 장성아들 142명이 참전했었는 데 그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미 제8군 사령관이었던 '밴프리드' 장군의 아들은 B-26기의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는 데 전사했다.

 

9.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의 공훈

 

미국 전사(戰史)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중공군 12만 명을 막지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며 이 전투의 한 가운데에 바로 타계한 '데이비스' 장군이 있었다.

 

10. The Chosin Few(생존자협회)

 

"장진호 전투" 이후 이 전투애서 생존한 장병들의 모임(미국 캐나다 호주)"초신 퓨(Chosin Few)"라고 부르며 이들은 세계 52개 지역에서 그때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Chosin Few 생존자협회)1984년 회원 6.000명으로 결성되었다. 또한 한국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관한 수기(手記)가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12 종류)되기도 했다. 지금도 "장진호 전투"에 관한 내용의 수기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 Chosin '長津'을 일본어로 발음한 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해병대도 미군과 같은 전술지도(50.000분의 1)를 사용하였다.

 

11. 노년의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은 여생을 불우한 재향군인을 돌보는 일과, 한미 유대강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위령공원' 건립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회장직을 수행했다. 그외에 그는 1991'평양'을 방문하여 원탁회의에 참석했으며 또한 2002년에는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미군유해 회수를 위한 미국정부의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자유 향유의 댓가"에서 한국민들에게 다음과같이 말했다.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혹독한 고난과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강력한 힘을 향유하는 것이며,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만을 고집하던 자들의 목소리가 국민의 의지를 약화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런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굼할 따름이다.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수많은 한국민을 공산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자유를 찾게한 미 해병대 예비역 대장,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 (Ret.))은 심장병(Heart attack)으로 200393일 조지아 주 '칸여스' 소재 '카운티 병원'에 입원 3일만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 해병대 사령관 '마이클 W. 해기' 대장, '젤 밀러' 상원의원, 죠지아 주 '선니 풀듀' 주지사외에 수백명의 퇴역군인들(Veterans)이 참석하여 그의 타계를 슬퍼했다.

 

Gen. Raymond G. Davis 미 해병대 부사령관 - 1971.3,12 -1972.3.31 -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

 

Gen. Raymond Gilbert Davis U.S.M.C, (Ret)ROTC 출신으로 1938627일 해병소위로 임관 후 19386T.B.S.(The Basic School Philadelphia Navy Yard)에 입교, 졸업 후 최초 근무는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 USS Portland (CA 33) 해병파견대에 배치되어 함상근무로 시작하여 19418월 중위로 진급, 19422월 대위로 진급, 194310월 소령으로 진급, 194410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미 해병 제1사단 제7연대 제1대대장 및 제7연대 부연대장), 그리고 월남전(해병 제3사단장)에 참전하였다.

 

195310월 대령으로 진급, 196371일 준장 진급, 196611월 소장 진급, 1970년 중장 진급, 1971223일 미국 Nixon 대통령에 의해 대장 진급과 동시에 미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71312일에 상원의 승인을 받았다.

 

특히 한국전쟁 중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 있던 해병 제7연대 제2대대 F 중대를 같은 연대의 제1대대장이었던 '데이비스' 대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막대한 인원 손실이 예상되었던 2개 해병연대의 탈출을 가능케 한 공로로 19521124일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서 미국 최고훈장인 "Medal of Honor"를 수여 받았으며 한국정부로부터도 그의 한국전쟁 중의 공로로 한국의 최고훈장을 수여 받았다.

 

특히 그의 진급과정에서 독자들(해병대 장교)이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은 중령에서 대령진급은 그의 최고훈장(Medal of Honor)수상에도 불구하고 9년이나 걸렸으며 그의 장군진급도 10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맡긴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임진강 너머의 서북쪽지역, 판문점 포함)에 배치되어 중공군과 전투할 때 '데이비스' 중령은 제7연대 부연대장이었다. 이때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좌일선연대로 배치되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blog.empas.com/marinekslee 해병대 전투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1963년에 장군 진급을 했으며 월남전에는 미 해병 제3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월남정부'로부터 월남 최고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장군은 미군 전사상 가장 많은 (서훈)훈장을 받은 장군이다. 1971년 대장진급과 동시에 미 해병대 부사령관(1971.3,12-1972.3.31)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을 끝으로 퇴역하여 그의 34년 간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 by oldmarine (사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