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최첨단 산업보다에너지 산업만 강조…유가하락 역풍에 최대 위기
- 푸틴 러시아 대통령
러시아 연해주에 진출한 한 국내 식품 유통 기업은 지난 1~2월 매출이 '0원'이었다. 작년 같은 기간 매출이 500만달러(55억원)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돌변했다. 루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입품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에 "팔면 팔수록 손해"라며 판매를 중단한 기업도 있다. 물건을 팔아 루블화를 받아도 달러나 원화로 환산한 가치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아예 '러시아 시장 철수'를 고려하는 기업들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유가가 회복되고 루블화 가치가 오르며 연초부터 세계경제를 괴롭힌 '러시아 부도설'은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작년 러시아 중앙은행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린 결과 투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달러 대비 루블 가치는 올 들어 18% 올랐다. 러시아 증시도 올 들어서만 20% 이상 반등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일부 현지 기업인과 경제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경제 위기는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유가 하락' 여진(餘震)에 떠는 러시아 경제
국제기구들이 예측한 올해 러시아 성장률은 -4~-5%다.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이다. 높은 에너지 자원 의존도, 혁신 하이테크 산업 부재, 지역 간 발전 불균형, 취약한 금융 구조, 노동생산성 하락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경제 기초체력이 약하다 보니 유가 하락과 서방 경제제재 등 외부적 요인에 쉽게 흔들린다.
1999년 전체 수출에서 40%였던 석유와 천연가스 비중은 2014년 60%를 휠씬 넘겼다. 유가 하락으로 러시아의 작년 수출은 전년 대비 6% 감소했다. 올해 평균 유가 전망치는 배럴당 55달러다. 작년과 비교하면 배럴당 40달러 이상 낮다. 러시아 수출은 올해도 큰 폭의 감소세를 보일 것이다.
유가 하락은 재정 감소와 직결된다. 러시아 재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재정 수입의 50%가 석유와 천연가스와 관련된 세금에서 나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푸틴 대통령은 2015~2017년 정부 지출 삭감을 명령했다.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의 임금을 10% 삭감했다. 이런 노력에도 올해 재정 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8%에 이를 전망이다.
돈 가뭄은 기업들에까지 미쳤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對)러시아 경제제재로 러시아 기업들이 국제 자본시장에서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며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러시아 기업들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갚지 못해 2016년 유동성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원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산업 혁신은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임 메드베데프 대통령 때부터 시작한 산업 현대화 노력에도 전체 제조업에서 하이테크 산업의 비중은 2005년 이후 줄곧 10% 이하다. 세계적 수준의 기초 과학기술과 대조된다.
이는 혁신 관리 부재와 기술 상업화 실패에 따른 결과다. 푸틴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최첨단 산업보다는 에너지 산업을 강조하는 보수적 시나리오에 따라 통치했다. 이 전략은 유가 하락의 역풍 앞에 최대 위기 국면을 맞았다. 서방 제재로 에너지 관련 기술 도입이 어려워지며 북극·심해 유전 개발 등도 난관에 부딪혔다.
여기에 고령화와 인구 감소, 노동생산성 하락까지 겹쳤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으로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작년 1억4250만이었던 인구는 2025년에는 1억2000만명까지 감소할 전망이다. 2005년 37.3세였던 중위 연령(전체 인구 중 50% 지점에 해당하는 연령)은 2015년 38.9세로 높아졌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13%다. 65세 인구 비중이 14%를 넘는 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러시아의 노동생산성은 독일의 40%에 불과한 실정이다.
우울한 경기에 비관으로 돌아서는 러시아인들
'인내의 민족'으로 불리는 러시아인들도 위기 상황 앞에 비관적으로 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러시아인 10명 중 6명이 서방 제재에 따른 경제 위기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작년 5월 조사에서는 러시아가 경제제재에 따른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비율이 55%였는데 이번엔 이 비율이 31%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비관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체감 경기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루블화 가치 하락과 유럽연합(EU)의 농산품 금수로 물가는 치솟았다. 반면, 1999년 푸틴 집권 이후 계속 올라 2013년 월 940달러에 이르렀던 임금소득은 작년 783달러로 확 줄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3개월 동안에만 실업자가 14만2000명 늘었다. 이와 별도로 10만4000명이 무급 휴가 중이다.
러시아 국민들의 주머니가 얇아지면서 소비도 가라앉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수요는 전년 대비 10% 이상 감소한 250만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올해도 자동차 시장 수요가 10% 이상 감소할 걸로 전망된다. 해외 자동차 브랜드들은 판매 가격을 절하된 루블화 가치만큼 올려 내놓을지, 이전 수준을 유지할지 눈치 싸움을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외국 기업은 러시아 사업을 철수하거나 축소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 기업 GM과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 르노는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현지 생산을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13년 한국보다 러시아 판매가 많았던 쌍용자동차 역시 잠정적으로 러시아 시장 판매 중단을 결정했다.
자동차, 휴대폰 회사들이 판매를 주저하는 동안 시장엔 물건이 모두 팔려나가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한국 정부기관의 고위 관계자는 최근 현대차를 구하러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단 한 대 남은 SUV를 구할 수 있었다. 삼성 휴대폰은 중국에서 "러시아에 가면 반값에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중국인들이 싹쓸이해 가는 바람에 매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줄고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외국인 투자 유치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작년 러시아로 유입된 외국인 투자는 190억달러로 직전 3년간 평균 유입액의 30% 수준으로 급감했다. 물론 2013년 영국 석유 메이저 BP가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Rosneft)와 지분 교환을 하며 외국인 투자 유입액이 크게 증가한 효과도 있었지만 많은 서구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한 게 주된 이유였다.
이를 메우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국영기업의 투자를 독려했지만 작년 전체 투자는 오히려 그 전년보다 2% 줄었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주요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빌려올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를 상환하는 데 정부 지원이 동원됐다. 외환보유액은 지난 3월 말 현재 3563억달러로 제재가 시작된 전년 3월 말과 비교해 약 1300억달러 감소했다.
유가 하락으로 수출이 줄고 제재로 외국인 투자 활동이 위축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는 평화적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장기화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2월 러시아의 국가 신용등급을 투자 적격인 'Baa3'에서 투자 부적격인 'Ba1'으로 강등했다.
회복에 안간힘 쓰는 러시아 지도부
러시아 정부와 의회는 고사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온갖 응급처치를 동원하고 있다. 일단 정부 고위층이 잇달아 경제 심리를 개선시키는 발언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6일(현지 시각) TV 생중계로 진행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루블화가 안정세를 되찾고 전문가들도 러시아 경제가 최악은 벗어난 것으로 본다"며 "국민들이 특히 제재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우리에게는 충분한 자원과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경제는 앞으로 2년 안에, 혹은 더 일찍 회복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울류카예프 러시아 경제장관은 지난 23일 "최근 경기 지표가 올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며 "경기는 내년 2.3%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한편에선 서방 제재의 폐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최근 의회에 출석해 "작년 한 해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로 GDP의 1.5%인 267억달러의 경제적 손해를 입었다"며 "올해는 이 규모가 8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작년과 올해 손실액을 합하면 1060억달러(약 114조원)에 이른다.
심지어 유휴 인력을 강제로 노동시키는 방안까지 거론된다. 러시아 2위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취업 연령임에도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이른바 '기생 인력 처벌법'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 법은 최장 1년까지 강제노동에 처할 수 있는 규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는 9일 전승 기념 70주년 이후 애국주의 분위기가 수그러들면 EU와의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EU는 러시아 대외무역의 50%, 외국인 투자 유치의 80%를 차지하는 주요 교역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또 극동 개발과 연계하여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역내 국가로 참여하는 등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협력을 적극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러시아가 주도한 유라시아 경제연합과 베트남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