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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의 끝없는 복수극

Marine Kim 2016. 12. 15. 08:40

남정욱의 영화 & 역사] 십자가와 초승달의 끝없는 복수극

  • 남정욱 작가
  • 입력 : 2016.12.15 03:11

['킹덤 오브 헤븐']

"神이 원하신다"는 구호 앞세워 11세기 예루살렘 쳐들어간 십자군
인종 청소 하다시피 주민 학살… 무슬림 영웅 살라딘이 탈환했으나
"모두 죽여버리면 된다" 증오심은 분쟁의 극단 오가며 여전한데…

남정욱 작가
남정욱 작가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다.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 이름에는 성경 구약의 인물이 둘이나 들어 있다. 유수프는 '요셉', 아이유브는 '욥'이다. 그러니까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이 살라딘과 예루살렘 성의 기사 발리안이 벌인 피 말리는 공방전을 다룬 작품이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으로, 영화의 기원은 십자군 원정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는 성지인 예루살렘을 짐승들이 모욕하고 있다며 파병을 주장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은 이교도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니 맘껏 죽이라며 교리까지 세탁했다. 우르바누스는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이 말은 나중에 십자군의 구호가 된다.

신이 원하셨던 그해 8월 15일 십자군은 서유럽을 출발한다. 아랍인들이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유럽인들이 종교를 이유로 쳐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세금을 걷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을 폐쇄한 적도 없고 기독교인을 핍박한 기억도 없다. 십자군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웠다.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 다다른다. 십자군은 한 달 만에 성문을 뚫었고 꿈에 그리던 성지에 입성한다. 이렇게 건설된 것이 에데사,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십자군 왕국 벨트다. 요 대목에서 등장한 아랍의 영웅이 살라딘이다. 아랍 세계를 통일한 그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예루살렘의 재탈환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도중 벌인 살라딘의 보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잘라낸 십자군의 머리를 투석기에 담아 날려보내는 것은 기본이었다. 양쪽 모두 인간에서 이탈한 채 누가 더 잔인할 수 있는지 경쟁하듯 베고 썰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대략 이 지점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감독은 그 누구도 다시는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어마어마한 볼거리를 쏟아놓는다. 섬광이 충돌하는 것 같은 기병전은 애피타이저다. 예루살렘 성을 놓고 벌이는 공성전(攻城戰)에서는 중세 전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데, 성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공성탑의 모습은 영화가 끝나고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다. 전투만 죽어라 하면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다. 캐릭터들이 펄떡펄떡 살아서 뛴다. 살라딘이 아랍 세계의 총사령관으로 떠올랐을 때 예루살렘의 왕은 보두앵 4세였다. 영화에서는 은색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문둥병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틴에이저가 제일 무섭다. 보두앵은 나이 열여섯에 500명의 기병으로 살라딘의 3만 대군을 격파한 전설의 사나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그는 겸손해진다. "신 앞에 서면 변명은 없어. 누가 시켜서 했다 혹은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건 안 통하니 명심해." 보두앵이 발리안에게 읊조리듯 들려준 충고다. 발리안과 보두앵의 여동생 시빌라 공주와의 로맨스는 설정이다. 속물인 남편에게 질린 시빌라가 발리안에게 끌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시빌라는 남편인 기 드 뤼지냥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인물 하나는 훤했기 때문이다.

잘생긴 것 빼고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던 기는 예루살렘과 살라딘이 처음 맞붙은 하틴 전투를 말아먹는다. 그걸 시작으로 십자군 도시들이 차례로 살라딘의 손에 넘어간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라딘에게 회담을 요청한 발리안은 성 안의 이슬람교도를 모조리 죽이고 이슬람 성소를 불태우겠다고 협박한다. 88년 전 성을 함락시킨 십자군은 인종 청소를 하다시피 이슬람 병사들과 주민들을 학살했다. 살라딘은 그런 참혹한 일을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성안의 십자가를 떼어내 거리로 끌고 다니며 침을 뱉었다. 십자군에게는 그게 더 치욕이라는 것을 살라딘은 알고 있었다. 다만 모욕의 한계는 명확히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성묘 교회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100년 이상 벌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서양과 동양의 전쟁은 끝난 것일까.

'킹덤 오브 헤븐' 개봉 2년 뒤에 나온 '킹덤'이라는 영화가 있다(싸구려 영화 아니다). FBI와 사우디 테러 조직 간의 피 튀기는 대결을 다뤘는데 폭탄 테러로 연인을 잃고 오열하는 요원의 귀에 대고 주인공은 말한다. "울지 마. 다 죽여버리면 돼." 테러를 지휘한 아랍 노인은 총격전 끝에 입에 피를 물고 죽어가면서 손자에게 속삭인다. "괜찮다, 아가. 모두 죽여버리면 된단다." 선뜩하다. 헤븐(천국)은 사라지고 킹덤(왕국)만 남아 증오심이 양쪽을 오가며 증폭되는 중이다. 세상의 분쟁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아마 이 갈등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십자가와 초승달(이슬람의 상징)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14/20161214029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