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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같은 스타 강사에 의해 멍드는 우리 역사

Marine Kim 2017. 3. 15. 07:33

설민석 같은 스타 강사에 의해 멍드는 우리 역사

-설민석의 역사 강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류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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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tvN '어쩌다 어른' 방송화면
한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어쩌다 어른’ 중 설민석의 역사 강연을 보다가 짧은 강연에 드러난 적지 않은 오류에 자칫 다수의 시청자가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오해할 수 있으리라는 염려에서 이 글을 쓴다. 해당 방송은 OtvN(2016. 6. 16)에서 방영된 ‘어쩌다 어른 38화’로 대부분의 시간을 세종대왕 이야기로 채우다가 마지막에 약 8분 동안 ‘염치(廉恥)’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인물로 최익현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그 8분 동안의 강연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사실 관계에서 명백하게 오류를 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설민석은 어른은 적어도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면서 ‘염치’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풀이하였다. 일견 맞는 것 같지만 염치는 ‘강직(剛直)한 마음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흔히 예의와 염치 두 단어로 곧잘 쓰이고 있으나 본래는 예(禮)·의(義)·염(廉)·치(恥)가 각각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관자(管子)』에 국가를 다스리는 중요한 네 가지 요소, 즉 사유(四維)로 소개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염(廉)은 불의(不義)를 보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강직(剛直)한 마음을, 치(恥)는 잘못을 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염치를 치(恥)의 뜻에 한정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풀이한 것은 잘못이다.
다음으로, 설민석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보면 말도 안 된다’고 운을 떼면서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먼저 강화도 조약을 맺으러 간 사람의 첫 마디가 ‘문호 개방 하려고 도장을 갖고 왔는데, 조약이 뭐요?’, ‘오늘날 외교부에서 나간 사람이 한 소리에요’라며 당시 우리 협상 대표를 형편없는 인물로 비하하였다.

당시 조선국 대표는 접견 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이었다. 어려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수학하고 개화파 인물인 강위, 박규수 등과도 폭넓게 교유한 그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힘을 보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 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전형적 무관 가문 출신이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어 유장(儒將)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1876년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은 속칭)에는 접견대관으로 협상을 책임졌으며, 1882년 조미 조약에는 전권 대관(全權大官)으로 조약 체결을 담당하였다. 2월 2일에 있었던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 과정을 보더라도 체결 직전인 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본국 대표 구로다와 협상을 진행한다. 3일 동안의 협상 과정에서 신헌은 일본 측 대표에게 전혀 비굴하거나 물러섬이 없이 당당하게 임하였음은 고종실록에 실린 문답구어(問答句語)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특히 일본국 대표 구로다가 현재적 용어로 유감(遺憾)에 준하는 ‘회오(悔悟:뉘우침)’의 인정을 세 번이나 요구하였음에도 끝내 거절한 바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연구 검토와 이해가 부족한 비전문가가 함부로 비하해도 될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설민석이 말한 ‘조약이란 게 뭐요?’라는 대화는 ‘만나자 마자’가 아니라 협상 이틀째인 18일 대화에 나온다. 이 때 구로다는 13개 조항의 조약 책자를 신헌에게 건네며 국왕에게 보고하고 조약이 체결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해 신헌은 300여 년 동안 통상해오던 사이인데 갑자기 조약(條約)이 왜 필요한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서계(書契) 문제로 중단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왜관을 통해 이루어지던 무역을 그대로 재개하면 될 것으로 판단한 신헌의 입장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아직 만국공법에 따라 체결되는 국가 간의 조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대한 주저에서 나온 질문을 두고 무능한 관리로 치부하여 한낱 웃음거리로 삼은 것이다. 흥미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잘못된 사실 관계를 토대로 대상 인물을 비하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다음으로, 설민석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죄를 지으면 우리의 법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법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조항을 치외 법권이라 소개하면서, 이 조항 때문에 1895년에 발생한 민비(1897년 명성 황후로 추존) 시해 사건의 범인들을 우리 법으로 처단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치외 법권에 대해서는 현행 8종 한국사 교과서에도 아래와 같이 조일 수호 조규 제10관을 치외 법권 또는 영사 재판권을 허용한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국 인민이 조선 항구에서 죄를 지었거나 조선국 인민에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금성출판 229)
이 문장만 두고 보면 마치 일본인의 범죄를 우리가 처벌할 수 없는 치외 법권 조항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국가 간의 조약이든 개인 간의 계약이든 반드시 해당 조항의 전체를 살펴봐야 본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아래는 제10관 전체를 번역한 것이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만약 그 범죄가 조선국 인민과 관계될 경우 모두 일본국의 심리 판단에 맡기고, 만약 조선국 인민의 범죄가 일본국 인민과 관계될 경우 모두 조선국 관리에게 귀속하여 조사 판결하되 각각 자기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덮어주거나 치우쳐 숨김이 없이 공평하고 온당함을 밝히는 일에 힘써야 한다.<第十款, 日本國人民在朝鮮國指定各口, 如其犯罪, 交涉朝鮮國人民, 皆歸日本國審斷, 如朝鮮國人民犯罪, 交涉日本國人民, 均歸朝鮮官査辨, 各據其國律訊斷, 毫無回護袒庇, 務昭公平允當.>

 

이 조관의 내용은 일본인 범죄자는 일본국 관리가, 조선인 범죄자는 조선국 관리가 판결한다는 것으로 이를 치외 법권 또는 영사 재판권을 허용한 조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에는 조선국 범죄자의 처벌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사 재판권의 경우 조일 수호 조규에는 영사(領事)에 대한 조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에는 어느 나라 영사도 부임한 적이 없다.
우리 기록에 국제법상 영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2년 4월 체결된 조미 조약이며, 우리나라에 부임한 최초의 영사는 조미 조약 이후 1882년 8월에 부임한 일본 영사 마에다 겐기치이다. 따라서, 제10관은 치외법권(영사재판권)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 범죄자의 재판 관할권을 규정한 조관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이어, 설민석은 민비 시해범들이 본국으로 송환되어 우리가 처벌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조관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조관에는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라는 전제가 있다. 당연히 개항장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국한되며 궁궐에서 벌어진 민비 시해 사건과는 무관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시해범이 누군지 특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누가 재판할 것인지를 논할 계제도 아니었다. 처음 일본 측은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차츰 미우라 공사가 주축이 되고 일본 관리들이 가담하여 일으킨 사건임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들에게 퇴한령(退韓令)을 내려 본국으로 소환해 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소환 과정이 조일 수호 조규를 근거로 진행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 관계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설민석은 최익현을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린 인물로 소개하며 남들은 무서워서 못한 일을 최익현은 자신의 관직과 목숨을 걸고 이를 실행했다고 한다. 먼저, 조선시대의 탄핵(彈劾)은 현재의 탄핵과 다소 달라서 양사 즉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법을 어기거나 비리를 저지른 관원의 죄를 묻고 파면할 때 적용하였다.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양사에서는 탄핵 대상과 그 죄상을 분명히 적시하고 이를 국왕에게 상소하여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

 

설민석이 흥선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한 것은 1873년 말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이르는 것으로,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집』에는 ‘호조참판을 사직하고 아울러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소[辭戶曹參判, 兼陳所懷䟽]’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에서 최익현은 호조참판을 사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함께 만동묘(萬東廟)의 복구, 서원(書院) 신설 허용, 호전(胡錢:청나라 돈) 사용 혁파, 토목공사를 위한 원납전(願納錢) 징수 중단 등의 건의와 함께 마지막에 모든 정사(政事)를 정부 조직에 따라 운영하고 종친들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이 출입하는 창덕궁의 전용 문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함으로써 더 이상의 정치 관여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였다면 탄핵 대상인 대원군을 명시하고 그의 죄상을 조목조목 나열한 다음 이의 처벌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긴 하였으나 이를 두고 ‘흥선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지막으로 경복궁 건립과 관련하여 설민석은 정조 때인 1794년 수원 화성 축성 때부터 노임을 지급했으며, 경복궁 건립 때는 흥선대원군이 농민들을 잡아다가 노임도 주지 않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이다. 하나는 국역(國役)에 임금을 지급한 기록은 화성성역보다 훨씬 이전인 17세기 초에 이미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정조대에도 1789년 사도세자의 원소(園所)인 현륭원 역사(役事) 때 이미 임금을 지급한 사실이 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경복궁 토목공사에 농민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켰다는 주장도 기록과 다르다. 고종 실록에는 많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부역(赴役)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나는가 하면, 농사철임에도 경복궁 중건에 많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모여 들자 농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되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고종 실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할지라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노예처럼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설민석은 탄핵 상소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최익현은 고종더러 ‘당신 아버지의 명예는 지켜드리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시오.’라고 요구했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최익현의 상소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재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 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많은 시청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럴듯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설민석은 ‘대원군이 정치를 잘 했거든요.’, ‘문호를 빨리 개방했어야 우리가 흥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오류다.’, ‘개화는 해야 했지만 좀 더 따져보고 했어야 한다.’, ‘적절히 조화가 되었어야 했다. 그게 되지 않아 나라가 망한 것이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이는 모두 객관적 증거가 뒷받침 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부분으로 전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한 지식 전달자에 불과한 강연자가 다수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마치 정설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 강연은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 하다 보면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기에 간혹 흥미 유발을 위해 다소 부풀리거나 가공(架空)된 이야기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전체적 맥락에서 벗어나 오로지 흥미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된다. 특히, 강연자의 말을 그대로 믿으려는 경향이 강한 유명 강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하되 흥미 요소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특히 일본과 관계된 역사 강연에서 객관적 사실과 대상 인물을 이유 없이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비하할 경우 반일 감정을 조장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패배 의식을 심어줄 수 있어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설민석의 짧은 강연에 드러난 많은 사실 관계 오류와 과장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더불어, 그가 진행한 여타의 수많은 강연은 과연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