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

Marine Kim 2020. 11. 1. 13:12

Marine story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1]

 

 

해병대의 해체와 우리의 생각

 

1. 개 요

 

 

이 글은 필자(이근식 대령, 해병 도서부대장)197315일부로 해병 도서경비부대장으로 취임한 이후 부대지휘 중에 일어난 어처구니 없고 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과 필자가 해병대 근무 중(23년 간) 필자에게 일어났던 여러 정황에 대한 내용과 그에 대한 필자의 입장, 그리고 그에 대한 심경 등을 솔직하게 기술한 내용이다.

 

 

또한 생각할 수록 분통을 참을 수 없었고 슬펐던 우리의 모군인 해병대의 돌연한 해체에 따른 30여 년 전 그 당시의 우리들의 울분과 심경 등을 사실 그대로를 솔직하게 오늘의 현역 해병들과 이미 현역 근무를 마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해병가족들에게 소개하므로서 우리 모두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런 한 정권에 의한 망국적인 해병대 해체라는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 모든 해병가족들에게 경각심을 이르키게 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으며 이는 어느 특정인을 비방하기 위함이 아님을 나는 여기서 확실히 밝혀 두는 바이다.

 

내 나이 지금 90세이나 70년 전의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23년 간의 나의 해병대 근무가 타의(해병대 해체)에 의해 종지부를 찍은 30여 년 전의 실상 등을 나는 아직 어제의 일 처럼 해병대 해체에 따른 나의 비통함을 아직껏 잊지않고 있는 것같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를, 과장하거나 또는 왜곡함이 없이 이 글을 쓰고 있으며 이 내용도 내가 직접 입력한 것이니 독자들도 나의 심정이 되어 읽어 주었으면 한다.

 

 

2. 해병 도서경비부대장 취임

 

 

19737월초 해병대 사령부에서 "지휘관 회의"가 있었다. 1973년도 전반기 부대업무 실적보고 회의이다. 이때 해병대 사령관의 임기는 지난 630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으나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이 이렇다 할 특별한 사유도 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령관이 중임된 후의 "첫 지휘관 회의"였다. 이때의 해병대 사령관은 이병문 대장이었다.

 

나는 197315일부로 진해 한국 함대 해병보좌관에서 예상치도 않았던 도서부대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나의 해병대 생활의 마지막 국가를 위한 봉사로 생각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임지에 부임 후 나의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몇달 전 해병대 사령관실에서 사령관과 나의 보직문제로 한 바탕 크게 언쟁을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은 사령관의 고성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몇개월 동안 나는 나의 거취문제로 몇몇 친구와 의논도 하고 또 생각을 많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앞으로의 전망이 그리 밝지만 않을 것 같이 생각되어 더 늦기 전에 나 나름대로의 새로운 활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1230일 아침 일찍 사령부로부터 도서부대장으로 발령이 났다는 연락이 진해로 왔다.

 

 

이 의외의 소식에 반갑기도 했지만 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령관과의 언쟁 내용이 사령관에 의해 긍정적으로 받아 드려젔거나, 그렇지 않았으면 누군가 나를 위해 사령관에게 조언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다 하기 위하여 더욱 나의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꿍꿍이 속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의 새 임지로의 부임 초부터 그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부대 업무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나와 도서 경비부대장을 교대한 전임 부대장은 나의 동기인 안철환 대령(해간 3)으로서 한국 전쟁 중이었던 19525. 6. 7.8월에 서부전선, '장단, 사천강'지역에서 제2대대 제5중대장을 내가 하고 있을 때 그는 제7중대장이었다.

 

나는 19663월 초 1년 간의 주월한국 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에서 J-2, 전투부대가 파월된 이후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 J-1에서 근무를 마치고 귀국 후 파월전투부대인 청룡부대 교대병력의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 편성되는 사단특수교육대장으로 임명되어 19666월부터 19686월까지 2년 간 청룡부대의 2, 3차 교대병력을 훈련시켜 파월시켰다.

 

 

이 공로로 사단장(정광호 소장)의 특별한 배려로 해병대 사령관(강기천 대장)의 승인으로 1969년 여름 한국 해병대에서는 최초로 미국 육군대학(정규과정)에 입학하여 1년 간의 소정의 교육과정을 졸업하고 이듬해 19896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미 육군대학 유학장교의 선발시험에 당연히 있어야 할 면접시험을 사령부 인사국에서 생략했었는데 이것이 고문단측에서 문제가 되었었다. 물론 고문단측에서 나에게 면접시험에 대한 통보가 왔다. 그렇게 되면 학과시험에 나보다 성적이 좋게 나온 인사국 차장(L 대령)은 이미 합격자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낙방되는 것은 불보듯 빤했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사단장에게 그 면접시험에 관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고 "도미유학 시험에 떨어졌으니 진해소재 육군대학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사단장은 "아니야, 이 대령 그 동안 사단에서 고생이 많았는데 미국 육군대학으로 가고 인사국 차장인 L 대령은 사단 G-3를 시키면 돼"하고 사단장은 바로 나의 눈앞에서 서울로 해병대 사령관 (강기천 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사령관님 이근식 대령이 그 동안 사단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 제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미국 육군대학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이 대령 곧 가게될꺼야" 하고 말했다. 며칠 후 나는 도미유학 발령이 났다.

 

 

귀국 후 나는 진해소재 해병대학에서 부총장으로 근무 중(총장: 기지 사령관, 이봉출 소장 겸직) 총장의 해병 제1사단장 발령으로 1970년 가을 해병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임 사령관(이병문 대장)의 취임(19717월초)직후 함대 해병보좌관으로 전보되었다. 이때의 함대보좌관직은 전임자가 얼마 전 전역하고 공석 중이었다.

 

 

이때 나는 당연히 연대장으로 발령이 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의외의 한직으로 발령되니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오히려 격분까지 했다. 그것은 나의 해병대를 위한 헌신과 노력이 누구보다 각별했는데, 그것이 어떠했음을 당시의 해병대에서는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 대해서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신임 사령관에 의해서 나자신보다 나의 오늘까지 해병대를 위한 노력과 헌신이 무시되고 또 묵살되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분통이 터지고 또한 억울했다.

 

 

나는 어떻게 신임 사령관이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몹시 화도 났지만 인사권자의 마음대로이니 나인들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 나는 나의 오늘까지의 나의 노력에 따르는 경력, 남이 추종못하는 임무 및 업무를 수행한 것 등을 생각하고 탄탄 대로를 걷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치 높은 낭떨어지 위에서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 떨어진 그런 느낌이었다. 이때 그런 나에게 누군가에 의해서 그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욕구가 나에게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사령관을 만나서 이야기 중 사령관이 "귀관이 인사국장이야?"하고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생각도 않했던 언쟁이 돌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할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사령관은 나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연후에 답변했으면 거기서 끝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나에 대한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선입감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하여 들을려 하지도 않고 화부터 먼저 냈었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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