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5]

Marine Kim 2020. 11. 1. 13:17

Marine story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5]

 

 

 

4. 부대지휘의 장애요소

 

나는 이번 보직이 해병대에서의 마지막 보직으로 생각하고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예상치도 안했던 나의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었는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니 미리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그들은 사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방해자는 지구보안대였다.

 

나는 부대장 취임 후 상당기간 지방 유지들을 만나지 않고 부대업무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구보안대에서 부대장이 매일 지방 유지들과 술만 마시고 제대로 근무도 하지않고 있다고 엉뚱한 보고를 보안부대 본부에 하여 해병대 사령부에서 장군을 단장으로 한 20명으로 구성된 "전투준비 태세 검열단"까지 왔다 갔다. 2일간에 걸친 부대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의 검열결과는 양호로 나왔다.

 

이때 나는 사령부 검열단이 사령부의 연간계획에 의거 검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때 나는 부대장으로 부임한지 1개월 되었을 때였다. 나는 검열단장을 통하여 이곳 지구보안대의 보고로 검열을 오게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사실 나는 평소부터 보안대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렇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된 셈이다. 이들은 내앞에서는 항상 좋은 소리만 했으나 그것은 부대운영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었고 나에게 던지는 미끼였다. 이들은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부대운영을 방해하는 그런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전방중대장이 경유가 필요하다해서 경유 한드럼을 주었는데 중대장이 지역내 거주 어부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때만 하드라도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어부들은 군 부대에서 유출되는 경유로 어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경유를 어부에게 매각하다 보안대원에게 적발된 일이 있었다.

 

그때 지구보안대장이 이 보고를 나에게 하면서 "경유를 부대에서 매각할 일이 있으면 자기들에게 이야기하면 시세대로 팔아 주겠다"고 까지 마치 무슨 인심이나 쓰고 있는 것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었다. 사실 이것은 이들이 나에게 던진 덫이었다. 물론 이들 속에 꿍꿍이 속셈이 있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꾸도 하지않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하여 나는 보안대를 아주 무시하고 상대도 하지않았다.

 

특수 임무 요원은 그 상관이나 지휘관이 정당하고 공정하게 그들을 활용하지않으면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화되거나 또는 부대운영상의 장애요소가 될 뿐아니라 또한 부대 발전을 저하시키고 내부적으로 부대를 분열시키는 그런 독소적 요소로 변질되기 쉽다. 무릇 지휘관은 이런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그 지휘관은 이미 스스로 파멸 속으로 자신이 빠저 들어 가고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번 지구보안대의 보고는 비서실 대원과 일선중대장 간의 전화 통화내용을 지구보안대에서 감청한데에서 기인되었으나 이들은 그 통화내용을 일방적으로 멋대로 해석하고 보안부대 본부에 보고 한 것이다. 이때 나는 부대장으로 부임한지 1개월도 안 되었었다. 나의 부대 출근시간은 통상 아침 730분인데 그 날은 아침 8시 지나서 출근했었다. 그 내용을 지구보안대에서 감청한 것이다.

 

 

내가 이곳에 부임했을 때 이 지역의 지구보안대장은 추준호 소령(전역 후 목회자가 됨)이었는데 내가 부임한 후 1주일만에 부임한지 1개월도 안된 지구보안대장을 보안부대장(임경섭 준장)이 전격 교체시켰다. 이거야 누가 보드라도 정상적인 인사처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걸 보고 이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추 소령은 육군 공수교육대 이수자로서 나의 해간 및 공수교육대후배이며 또한 나와같은 기독교 신자로서 나와 친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추 소령은 내가 해병 제1연대 제2대대장을 196212월부터 635월까지(나의 도미유학 출발은 6월 중순이었다)할 때 중대선임장교였었다.

 

 

얼마 후 그는 제대하고 목회자가 되어 국내에서 목회하던 중 미국으로 건너 가 선교 활동을 하다 지금은 미국의 Indian 원주미촌으로 들어 가 현지인, Indian들에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나는 1961년 여름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미 육군 특수전학교 교육을 마치고 1962년 여름 전군에서 최초로 자원하여 육군 공수교육대 13기생으로 4주 간의 공수낙하 훈련과정을 이수했으며 나의 군 복무 중의 낙하산 낙하 회수는 총 43회 이다.

 

미 육군 특수전학교 입교

 

나의 미 육군 특수전학교 입교는 순 강제나 다름이 없었다. 해병대에서 처음 가는 과정이고 또 특수전학교라하여 전부 겁을 먹고 지망자가 없었다. 이미 도미 유학시험에 합격한 장교도 특수전이라는 용어에 두려움을 느껴 전부 기피하고 있었다. 미 육군 특수전학교의 입교일은 520일 전후였다.

 

사령부에서도 여러장교에게 의사타진을 했으나 한결같은 거부의사였다. 심지어 도미유학시험에 합격하고도 못가겠다 했다. 그들에게는 도미유학이 한낮 장식품이었지 군인으로서의 전술연마나 개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특수훈련이라는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그 많은 도미유학 합격자들은 이 과정을 거부했던 것이다. 과연 이런 이들에게 해병대의 미래를 걸수 있을지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결국 도미유학 시험에도 응시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특히 그때 사령부 참모부장은 나에게 자기의 심복이 되라 했다가 거절당한 바로 그 2연대장출신이었다. 그는 나에게 "제발 도미유학 가달라"고 하면서 부탁까지 했었다. 지난 날의 그 고압적인 자세는 전혀 없었다. 이런 그를 보면서 나는 지난 날의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끝내 거절하고 참모부장실에서 나왔다.

 

 

부사령관(고길훈 소장)에게까지 불려갔으나 나는 "도미유학 응시도 안했는데 왜 제가 가야합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러면 사령관에게 가봐"하는 것으로 이들은 자기들에게 위임된 직무이행의 의지, 즉 나를 설득해서 도미유학에 응하도록 하는 것을 사령관에게로 돌렸었다. 결국 우리의 Game은 여기서 끝난 셈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서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가기로 했다.

 

그때 나는 결혼일을 20일 정도 앞둔 5월말로 정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510일에 인사발령이 나고 촉박한 입교 날자로 인하여 출국수속도 초특급(3)으로 하고 515일에 육군 공수단 장교(대대장) 2명과함께 출국하였다. 5.16 군사구테타 소식은 미국의 San Francisco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Hotel Lobby에 놓여 있는 신문판매대의 신문 일면에 한국지도가 크게 난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628월 나는 미 육군 특수전학교에서 교육받는 동안 특수전술의 중요성을 알게되어 육군 공수교육대에 자원입교하여 4주 간의 공수낙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특수전학교의 교재를 번역하여 "반게릴라 작전의 전술과 기술"이라는 해병대 전술교범을 사령부 작전국을 통하여 발행했다. 이때 나는 사령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의 공수 낙하 훈련 중 수도방위 사령관(김진위 소장)이 지상 훈련에 한참 바쁜 나를 찾아 왔다. "귀관이 해병대에서 자원해서 공수교육을 받으러 왔다는 해병대 장교인가?"하고 나에게 물었다. "예 해병대 이근식 중령 입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역시 해병대는 다르군. 대육군에서도 공수훈련을 자원해서 받으려 하는 중령이 없는데 해병대 장교가 자원입교하여 교육받고 있다기에 부러워서 어떤 장교인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네" 하면서 나와 악수를 하고 돌아 간 일이 있었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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