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ne story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4]
육지로 나온 후 부 신부는 한강성심병원 9층에 그의 사무실을 차렸다. 병원의 이사장과 각별히 친한 사이일 뿐 아니라 병원확장에 적극 참여하여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도 지원받게 해서 오늘의 한강성심병원을 이룩한 대들보같은 역할을 했지만 병원 이사장과의 불화로, 여기에 자세히 기재할 수 없지만, 결국 한강성심병원 이사장과 결별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들에게 이용당한 셈이다.
그러나 부 신부는 자신과 부양가족을 위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는 1974년 봄 지금 국내에서 성업 중인 D.H.L.(문서송달회사)를 '홍콩.에 위치하고 있는 D.H.L.극동지국과 손잡고 문서송달 사업을 시작했다. 최초 홍콩지국으로부터 미국인 2명의 지원을 받아 회사설립을 일정기간 도왔고 자립 후에는 1명만 잔류하고 한국인 5명으로 마포에 사무실을 열고 영업을 개시했는데 몇개월 안되서 성업회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문서송달 업무는 땅짚고 헤엄치는 거나 다름 없었다. 회사는 날로 번창해 가기 시작했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예기치 않았던 암초가 생겼다. 체신부로부터 체신법 위반이라고 하여 중앙정보부에 고발되어 조사받기도 했는데 청와대의 권유로 이 땅짚고 헤엄치는 회사에서 도중하차 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자기의 후원자를 이렇게 방관했을까? 이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마치 박 정권이 해병대를 해체시킨 연유로도 비교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부 신부는 그들에게 이용당한 거나 다름 없게 생각되었다. 한 때 J 김도 그에게 정치적 후원을 부탁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부 신부로부터 나는 직접 들은 일이 있다.
그 당시 자본금 1억 원만 있었어도 법인체로 설립 운영이 가능했으나 1974년 당시의 1억 원은 부 신부에게는 큰 액수였다. 당시에 반포 APT. 36평형이 300만 원 시세였으니! 결국 "일양"에서 소정의 절차를 밟고 회사를 설립하여 현재 대성황리에 영업 중에 있다. 결국 죽써서 뭐에게 준 꼴이 된 셈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이 방면에 관심있는 기업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부 신부는 몇달 후 다시 사업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1976년 '울진' 원자로 7. 8호기 건설공사를 수주한 회사가 블란서의 "Althom" 회사인데 그 회사 소속 블란서 기술요원과 그들의 가족 100여 명의 생활지원, 학교운영지원, 및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물자와 식물 등을 운반목적으로 또한 원자로 건설기간 중 운용할 용역회사의 설립을 부 신부와 그의 친구 신부가 계획했었다.
그것은 당시 청와대비서실에 부 신부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비서관의 도움과 동자부장관이 청와대 비서관출신인 관계로 그 장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Althom사의 용역회사로 계약이 이루어질 단계에 이르렀는데 공교롭게도 그때에 유류파동으로 동자부장관이 교체됨으로 인하여 본 계약이 미루어지고 이로 인하여 Althom사의 요청으로 그들의 방계회사와 경쟁입찰을 하게 됐는데 총 입찰가에서 50만 달러 차이로 블란서 용역회사에 패하고 말았다. 생각할 수록 부 신부는 정말 한국을 위해 천주교 신부로서 또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측근인사의 후원자로서 애쓴 보람도 없이 시운이 따르지 아니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친구와 같던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미 유명을 달리하고 있으니 그의 어려울 때에 도움도 못받고 결국 그는 중앙대학의 영어강사로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이 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나와는 술 친구였고 나보다 나이도 아홉살 위였기 때문에 아주 가깝게 형제같이 지냈었다. 그러나 부 신부는 성직자가 그 직분을 버렸을 때 어떻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산교훈이었다.
아래의 내용은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2008.5.15 발간) 중에 미국인 부영발(George F. Muffet) 신부에 관한 내용을 전재한 것임.
'혁명의 당위성을 설득하라' 마펫트 신부의 헌신적 노력
5.16 혁명의 성공 여부는 결국 미국으로부터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 정부가 5.16 군사혁명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외국인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인 마펫트 신부(한국명, 부영발)였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신부로 당시 무의촌인 백령도에 병원, 결핵 요양원 등을 설립하여 봉사에 힘쓰시던 분이었다. 사령관 취임 직후 백령도 초도순시 때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펫트 신부는 같은 아일랜드계인 케네디 대통령과 절친한 친구로 중공에 억류되었던 그는 케네디 상원의원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다. 미국 귀환 후에도 그는 혹독한 중국 공산당 하의 탄압을 잊을 수 없어 1959년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서해 섬인 한국의 백령도로 와서 봉사하며 공산화된 중국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마펫트 신부는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미국 정부로부터 혁명지지를 얻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는데 그 영향은 대단했다. 5.16 군사혁명 지지 이유를 오직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기 위한 소망 때문이라고 한 마펫트 신부는 군사혁명 지지를 위해 군사혁명 다음 날인 5월 17일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해병대 사령관 비서실장 홍성철 대령을 찾아왔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카톨릭 신자인 장 총리를 전복시킨 군인들을 지지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하고 묻자, 그는 파안대소하면서 대답했다. "공산당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아실 장군이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전 중국에서 공산당의 체험을 혹독하게 치르었습니다. 혁명 군인들의 강력한 반공정책을 보고 아직 혁명에 회의적인 미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제가 먼저 지지한 것입니다."
그는 주한 미 대사, 미 8군 사령관 등이 혁명에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자. 아예 미국 정부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관실에서 나와 비서실장 홍성철과 함께 밤을 꼬박 새며 케네디 대통령과 백악관의 대학 동창( 보좌관들), 의회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혁명 지지지를 설득했다.
미국과의 시차 때문에 밤에만 전화해야 했는데 당시의 어려웠던 통신 시설로 인해 음향이 고르지 못해 무척 애를 먹어 목소리를 높혀 장시간 설득을 하고는 파김치같이 지쳐 늘어진 마펫트 신부의 모습이 지금도 나는 눈에 선하다.
그런 노력 끝에 장도영 중장과 케네디 대통령 회담까지 주선하였다. 비록 케네디 대통령의 유럽 방문으로 불발되었지만, 그해 11월 중순경 박정희 의장(이때 장도영 의장은 실각)의 미국 방문으로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은 실현되었다.
마펫트 신부는 대학 시절 헤비급 권투 주(州) 챔피언까지 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성격이 무척 소탈했다. 그 후 그가 서울을 들르는 경우 나와 자주 만나 우의를 나누기도 했는데 1980년초 건강이 나빠져 영등포 강남성심병원에 입원, 요양하면서도 세계구라협회(나병환자 구하는 일) 일을 돌보다가 1996년 9월 64세로 영면했다.
혁명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숨은 인사였고, 한국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순수한 의지가 지금도 나를 감동케 한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밀알 같은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marinekslee.egloos.com/850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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