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3]

Marine Kim 2020. 11. 1. 13:14

Marine story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3]

 

 

그것은 내편이 아니면 네편, 즉 적이다라는 당시의 해병대 저류에 오래 전부터 흐르고 있던 부대의 단결을 파괴하는 편가르기의 엉뚱한 논리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그때부터 오랜 후에 해병대 사령관 출신, 내가 평소에 존경하고 있던 "도솔산 전투" 때의 상관이었던 노 장군으로부터 직접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도 그것 때문에 해병대 사령관 시절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나에게 실토했었다.

 

 

신임 사령관(이병문 대장)과는 한국 전쟁 중 내가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중위)을 하고 있을 때 신임 사령관은 제3대대 작전장교(대위)였던 관계로 업무상 한두번 마찰은 있었겠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지냈었다. 그 후 나는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업무상으로나 개인적으로 한번도 가까이 지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유구무언으로 지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지난 날의 피나는 노력으로, 독자적으로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하지않는가? 나는 내가 이대로 가만히 속수무책으로 있는다는 것은 지렁이보다 못하다는 생각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 친한 동기생 몇몇과 의논도 했지만 별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들의 대답은 제3자의 입장에서의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결국 나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나는 사령관을 만나서 나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좀 무모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이 방법울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머리를 내가 깎아 보기로 한 것이다.

 

 

"왜 나는 연대장을 못하는 겁니까?"

 

그런데 사령관과 나의 보직 문제를 이야기하던 중 "저는 왜 연대장이 안되는 겁니까?"하고 당연한 질문을 했는데 사령관은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귀관이 인사국장이야?"하고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본의아니게도 사령관과 언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사령관이 나에게 그 사유에 대해서 무엇이건 설명을 했으면 그대로 조용히 끝났을 수 있었는데 사령관을 만나는 순간 사령관의 벌레씹은 듯한 얼굴을 보고 나는 내심으로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이때의 나는 사령관의 해명을 들었어야 하는데 사령관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나에게 한마디도 주지 못했다. 실은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화부터 낸 것이 아닌가? 만일 있었다면 내가 전임 사령관의 중임운동을 했다는 근거도 없는 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령관의 이런 말 몇마디에 나의 오늘까지의 피나는 노력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나자신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과 언쟁을 하게 됐는데 그것도 사령관이 먼저 시작한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사령관의 태도는 나에 대한 선입감이 얼마나 좋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도 안했던 도서부대장으로 발령이 난것이다. 꿩대신에 매였다. 그렇다해서 나의 응얼이 진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보병연대장이었다. 그래도 이때의 나에게는 감지덕지였지만 이것으로 나의 해병대 생활에 막을 내리게 되는구나 하는 종말적인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 동안의 나의 해병대에 대한 불편한 심기와 심적 고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나는 사실 나 자신의 명예를 걸고 도서경비부대장 근무를 부임 후 지방 유지들을 일정기간 만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의 원성을 들으면서까지 부대업무에 전념하면서 우선 전투지휘소(C.O.C.)부터 보강작업을 시작했다.

 

 

3. 백령도(白翎島)와 미국인 부영발 신부(George F. Muffet)

 

 

해병 도서경비부대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백령도(白翎島)에는 특별한 이방인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는 미국인 천주교 신부였다. 특히 이 미국인 신부와 백령도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는 196211월 암살당한 Kennedy 미국 대통령과 Harvard 대학 동창이며 또한 권투선수 경력을 갖고 있는 체중 100kg정도 나가는 거구이다. 이 부 신부는 이 지역에서 1952년부터 거주하고 있는 이 지역주민들의 친구이며, 유지이며, 또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중국 "Beijing"에서 '천주교"'신부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부 신부는 제2차대전 후 발발한 중국의 내전 중 '장개석'군이 중국본토로부터 대만으로 중국공산당에 의해 축출된 같은 해에 중국에서 추방되어 중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인 이 백령도에 그의 삶의 닻을 내렸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으나 무신론자인 중국공산당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 곳에 닻을 내린 부 신부는 이 곳 백령도의 지역사회 발전과 도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각종 구호물자등을 미국으로부터 후원받아 30년 이상 이곳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어서 이 지역의 대부로 존경받고 있었다.

 

 

나와는 첫 만남에서부터 각별한 사이가 됐다. 우선 말이 통하고 직위상으로 외톨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술 친구로서 자주 나는 이분과 더불어 어울렸다. 그런데 30년이상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왠지 한국말은 아주 서툴렀다. 종종 박정희 대통령과도 그의 후원자로서 교제가 있어서 청와대에서 호출이 있으면 야밤에도 배(발동선)로 다녀오기도 했다.

 

 

청와대에는 해병대 대령출신인 홍성철 수석비서관이 재임 중에 있어서 낮이건 밤이건 그의 호출이 있으면 부 신부의 개인 어선으로 서울에 다녀 오기도 했었다. 특히 이 부영발 신부는 5.16 군사 구테타를 뒤에서 적극 지지해 주었고 당시의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미국 조야에 널리 알렸고 또한 미국 의회의 청문회에도 참석하여 한국을 위해 증언한 바도 있다.

 

 

 

그런 연유로 이 분은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 뿐 아니라 군사정부를 위한 큰 후원자가 아닐 수 없었고 따라서 청와대 출입도 빈번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 부 신부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것은 '대청도'에 거주하고 있는 과부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비를 꼭 닮은 아이였다. 이로 인해 부 신부는 천주교로부터 파문당해 신부직을 박탈당하고 내가 이곳으로 부임한지 3개월 만에 '백령도'를 떠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부양가족과 함께 지냈다. 나와는 짦은 아쉬운 교제기간이였으나 그가 떠날 때 많은 도민들이 그와의 이별을 슬퍼했고 아쉬워했으나 그가 설 땅은 이 곳에는 없었다. 그의 후임자로 Thomas 신부가 부임했기 때문이었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marinekslee.egloos.com/85031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