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1]
해병대에서 전투 중 육박전을 한 지휘관은 해간 3기생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수 많은 해간 3기생 소대장, 중대장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희생시켰단 말인가? 해간 3기생출신들을 오늘에 와서도 그렇게 옛적에 생각하고 있던 것같은 그런 온순하고 고분 고분했던 그런 자기 부하처럼 웃읍게 봐서는 안된다.
선배는 선배로서의 위엄과 체통을 지킬줄 알아야 하며 또한 겸손의 미덕도 보일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면을 보고 듣기를 원하고 있음을 역대 해병대 사령관출신 장군들이 알고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11. 해병대 해체의 먼 원인(遠因)
해병대는 특히 육군과는 과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공연한 허세를 그들에게 부린 일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우리는 해병이다"라는 큰 자부심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은 이것은 약자의 변명이고 또한 소수집단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겠지만 그런 우리의 심중치 못한 언행이 결과적으로 해병대호라는 배를 침몰시키는 먼 원인 중의 하나로도 생각할 수 있다.
육군에 대한 혐오감
우리가, 해병들이 육군을 싫어하게 된, 무엇 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잰 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 육군 제6사단의 후퇴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좌일선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해병 제1연대도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으로 2박3일 간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힘들고 어려운, 우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후퇴이동을 했었다.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그때 우리는 육군은 장교이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했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전했던 해병들에 의해서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따라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나는 그때 해병 제1연대제1대대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은 대대 첨병소대장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해병대 전투(3)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자주 주변에서 보게되거나 듣게되는데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것은 옳치 않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의 부득기한 사실로 받아드리고 이제는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해병 정신
그러나 우리는, 해병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해병정신이 무엇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되었고 또한 그 속에서, 어려움과 역경 속애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전우애(상경하애의 희생의 정신)를 깨닫고 또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상황처리 방법과 능력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특히 자신에 대하여 알게되어 "상승해병",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해병정신의 기본기틀을, 정신적, 체력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 해병정신은 결코 어떤 이론, 우리의 머리 속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이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것은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병 정신"은 시련이나 역경을 통한 체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말이나 무슨 문서로도 얻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는 자가 있으면 그런 자는 거짓말쟁이거나 혹은 모방자일 것이다.
(4) 군 상호 간의 예의
해병대가 해체 될 임시의 해병대 사령관의 계급은 대장이었으나 기수에 있어서는 육사 9기생과함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해간 1기생을 육사 9기생출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합참회의에 당시 특검단장인 육사 2기생출신인 육군의 고참 중장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회의 중 해병대 사령관과 특검단장 간에 언쟁이 있었는데 그때의 해병대 사령관의 언행에 대해서 주변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던 육군 수뇌부 장성들이 아무리 대장이기로소니 상대가 중장이라 할지라도 기수에 있어서는 새까만 선배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들의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육군 장성들의 평이었다는 후문이 전군에 퍼진 일이 있었다.
이런 행태는 누가 봐도 좀 지나첬다고 할 것은 당연하지않는가?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 하더라도, 또 군 편제상 부득기하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군의 조직에 있어서도 계급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당연하나 그 보다 앞서는 불문율이 있다. 그것은 계급보다 군에서는 출신 기수의 선, 후배관계를 더욱 중요시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사령관은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때 사령관은 부사령관인 이봉출 장군의 동기생들이 대대장(소령)할때 대대 작전장교(대위)였으니 지난날의 상관이 지금은 자기의 부사령관으로 있으니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병문 사령관이 거꾸로 된 세계에서 살지 않고 순리대로 된 세계에서 이봉출 장군이 사령관이 되고 다음에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으면 그의 임기 중에 해병대가 해체되었다는 오명은 듣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봉출 장군의 해병대 사령관 임기 중에 해병대 해체라는 불법적인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해병대 해체라는 초법적인 처사는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일련의 아쉬움을 나는 아직 갖고 있다.
사실 이병문 사령관은 그리 성급히 서둘러 사령관이 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았어도 그의 나이로 봐서 또 해간 1기생 중에는 그때 경쟁자가 없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나, 실은 그보다 앞서 같은 1기생인 1연대장 출신인 김한수 장군은 신임 사령관보다 1년 앞서 장군 심사에 통과 되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시의 사령관(김두찬 중장)에 의해 진급이 보류되고 1년 후에 신임 사령관과함께 별울 달았으나 계급정년이 될 때까지 소장진급은 못하고 전역하고 말았는데, 나는 이 점이 신임 사령관을 위해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지한 정치인들
이런 것, 군의 서열을 무시하거나 또는 간과하는 것같은 것을 볼때 정치인들은 군의 실정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또는 무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군의 인사에 직, 간접으로 관여 하려했고 또한 여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해병대는 이런 정치인에게 특별히 약했다. 그러니 해병대의 인사정책에 혼선을 종종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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