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0]

Marine Kim 2020. 11. 1. 15:36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10]

 

 

강복구 대령이 누구인가?

 

해병대 출신이라면 강복구 대령이 누구인지 모르는 현역이건 예비역이건 없는 해병대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대표적인 해병대 장교가 아니었던가? 해병대 사령관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해병은 없었다.

 

그런 그가 주변 인물의 잘못된 보좌로 인하여 곤경에 빠져있을 때 강복구, 강복구하면서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같은 시대의 사령관출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방관만 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해병 정신도, 그들이 우리에게 전수한 해병 정신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있음도 생각하게 됬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구호 속에서만 살았단 말인가? 해병 정신은 그렇게 나약한 자기 위주의 정신이 아니고 자기 희생의 정신, 남을 위한, 즉 부하사랑의 정신이라는 것을 나는 그들에게 오히려 깨우처 주고 싶다.

 

결국 선배의 양보로 그 법정 싸움은 일단 수습이 되었지만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이라는 우리 해병대의 특유 Motto 가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그 구호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외 홍보용이었던가?

 

도대체 해병대 해체 후(1973.10.10)의 역대 해병대 사령관출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중동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 해병대 선, 후배 간의 분쟁을 직, 간접으로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 그렇게 방관만 하고 있었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그것은 해병 정신과 해병대 전통을 계획적으로, 그렇지 않겠지만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같은 그런 행태가 아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에 극한 된 문제가 아니라 해병대의 내분을 온 천하에 광고한 거나 다를 바 없는 추악한 행태였다. 그런 것을 방관만하는 그런 옹졸한 정신으로 어떻게 해병대 사령관을 했었는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 뿐 아니다. 어떤 사령관출신은 자기가 추천한 장군을 해병대 전우회 총재를 시키기 위하여 해간 3기생출신은 총재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면서 극구 반대했었다. 아무리 사령관출신이기로소니 그렇게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고 또한 사려깊지 못한 위인이 해병대 사령관을, 무슨 배경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했으니 해병대가 제대로 관리, 운용되었을 리가 만무했다.

 

 

 

도대체 해간 3기생들이 어디가 부족해서 누구보다 해간 3기생을 잘 알고 가까히 지내고 있었던 사령관출신이 지금에 와서 그런 경솔한 망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 전쟁 시 해간 3기생들이 없었으면 해병대라는 존재가 과연 유지되었으리라 생각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어떤 사령관은 "우리 예비역들이 사령관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돕겠다" 고 내가 대화 중에 말했더니 그의 대답은 아주 엉뚱했다. "예비역들이나 서로 싸움질이나 하지마십시요"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 순간 마치 무슨 미친 개에게 물린 것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해병 정신이고 해병대 전통인가?

 

그렇게 큰 소리를 치던 그가 전역 후에 한 일이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하여 해병대의 단결을 와해시키는 분열 책동을 선배에 대항하여 법정 다툼으로 하고 있었으니 어느 사령관을 탓하랴!. 바라건대 사령관출신 노해병장군들은 후배 해병들로부터 존경 받는 전임 사령관으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의 애군정신을 본받자.

 

아무쪼록 해병대의 초대 사령관이며 또한 우리 KMC의 영원한 정신적 사령관인 신현준 사령관님을 본받는 애군의 정신을 현실로,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역대 해병대 사령관출신 노장군들이 보여줄 것을 우리 해병가족들은 큰 기대를 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령관을 했다해서 그 장군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될 때까지의 그의 해병대를 위한 헌신도와 재임 중의 업적, 그리고 퇴임 후의 해병가족사랑이 어떠한가에 의해서 후배 해병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노해병들은 사령관출신 노장군들에게 일깨워 주고 싶다.

 

 

우리는 KMC의 초대 사령관이며 또한 우리의 영원한 정신적 사령관인 신현준 장군과 그의 후임 몇몇 해병대 사령관들의 해병 정신과 그들이 이르킨 해병대 전통이 계속 유지되며, 아울러 우리 모든 해병가족들 속에서 그 정신이 역동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10. 해간 3기생

 

 

해간 3기생은 최초 180명이었다. 민간 출신 150, 대내 출신 3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 민간 출신은 대학 재학 중에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순수한 구국의 일념으로 해병대 사관 후보생 3기생으로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 전에 장교가 된 해간 1 2기생들과는 다르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갖고 있다.

 

 

특히 "도솔산"전투에서는 해간 3기생들이 전부 소총소대장으로서 24개 목표 공격 시 맨 선두에서 여러명의 소대장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격하여 점령했었다. 그때 우리는 적과 총, 검으로 육박전도 감행했다. 그리고 도주 중에 있었던 적을 쫓아 가 직접 생포하기도 했다.

 

서부전선에서는 어떠했는가? 중공군과의 전투를 어느 누가 했단 말인가? 대대장이? 아니면 대대 작전장교가? 천만의 말씀! 나는 그들의 실정을 누구 보다 더 많이, 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대대장, 대대 작전장교들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해병대 전투(1.2.4.5 6)에서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일선중대장을 했고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전투 지휘를 어떻게 한 것도 현장에서 보고 알고 있다. 서부전선에서 전투할 때도 중대장들은 역시 전부 해간 3기생들이었다.

 

내가 연대 작전보좌관을 할 때 어떤 대대장은 나를 만나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자기 대대를 잘 봐달라고 일개 중위인 나에게 부탁하는 겸손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의 그 겸손했던 대대장을 아직껏 존경하고 있다. 그는 후년에 해병대의 첫 4성 장군이 되었다.

 

 

반면에 어떤 대대 작전장교는 자기의 요구를 관칠시키기 위하여 나에게 협박까지 한 일도 있다. 나는 그런 작전장교에게 눈하나 까딱 않했다. 그때 나는 그 작전장교를 몹시 경멸했다. 그는 별을 달고도 역시 그 야비했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전역 후에도 역시 말썽꾸러기었다. 개버릇 남 못준다는 격이다.

 

 

한국전쟁 후에도 해병대의 부대마다, 부서마다 해간 3기생들이 없는 곳이 있었던가?. 사실 해간 3기생들은 해병대를 움직이고 있는 해병대의 중추역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해간 3기생이 무능해서 해병대 전우회 총재로서는 적합지 않다니! 이 얼마나 가소로운 소리인가? 그럼 자기는 해병대 사령관이 될 자격이 있어서 되었단 말인가? 이거야 말로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나무라는 꼴이 아닌가?

 

전쟁 초기의 그 어려웠던 시기에 해간 3기생 180명이 해병대 전체의 소대장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한국 전쟁 시 적과 직접 육박전을 누가 했단 말인가? 그들은 전부 해간 3기생들이었다. 육박전을 할때 결사적이고 다급했던 심경을 이해나 하고 있는지 나는 묻고싶다. 독자들도 그때의 우리의 절박했던 심정이, 죽느냐? 살 수 있느냐?하는, 어떠하였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당사자이외는 어느 누구도 사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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