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5]

Marine Kim 2020. 11. 1. 15:41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15]

 

 

 

해병대는 이런 점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했고 무지했었다. 그것은 그때 해병대는 독불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일수록 해병대는 내부적인 단결력과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을 대내외에 과시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우물안의 개구리같이 내편, 네편이나 따지는 근시안적인 행태 속에 있음으로서 정권내부의 이상한 기류의 흐름에 전혀 무감각하였고 또한 무지하였다. 이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점이다.

 

 

이 때의 해병대 수뇌부는 정권내부에서 흐르고 있던 이상 기류(?)도 감지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령관의 중임이 기쁘고 감사해서 그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계략도 모르고 설마? 하고 있다가 한방 얻어 맞은 것이 아닌가?

 

 

그들은 과연 사심 없이 사령관을 올바르게 보필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누군가 이에 대하여 대답 좀 해 보라!. 그러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과연 해병대 사령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한번 대답 좀 해 보시라!

 

 

그것은 해병대내에 잠재하고 있던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활동에 가장 장애요소가 되었던 편가르기, "내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유치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였다. 편가르기의 전형적인 사례를 아래의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잇다.

 

 

14. 해병학교 출신 장교와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 간의 마찰

 

 

해병학교 출신 장교와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와의 차별 대우에서 기인한 마찰같은 것이 편 가르기의 좋은 산 표본이다. 이런 현상은 초기 단계에서는 순수했지만 일부의 몰지각한 몇몇 해군 사관학교 출신 선배 장교들의 책동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않게 분열 현상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네편, 내편으로 표면화 되어 결국 해병대의 내부적인 단결을 좀 먹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암적인 존재였다.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19546월 내가 미국 해병학교(Basic School U.S.Marine Corps Schools)에서 나의 동기생(김종대 대위)과 함께 교육받고 있을 때 미국 해병학교로 처음 유학 왔었다. 이들은 전부 한국전이 끝난 후에 해병대로 전과한 장교들이었다. 해군 사관학교 4기생 1, 5기생 1, 6기생 1, 그리고 7기생들 7-8명 였었다. 그리고 해병학교 출신 대위와 중위도 그들 속에 함께 포함 돼 있었는데 이들 속에 이미 그때부터 문제가 싹트고 있었다. 이로 인한 약간의 문제도 미 해병학교에서 있었다.

 

 

그것은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장교들의 행위로 인하여 발생했었다. 그것은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과한 해사출신장교들의 미국에서의 해병대 상급장교에 대한 불손한 언행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그와같은 행위는 해병대 수뇌부의 무관심과 평소의 해군장교들의 해병대장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였다. 그 사실에 대해서 나는 "노 해병의 어제와 오늘"에서 자세히 설명한바 있다.

 

 

그 후부터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임소위들 00명씩 정책적으로 해병대로 전과시켰다. 그 중 제일 먼저 해병학교 기초반과정에 입교한 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9기생 22명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자기들은 해군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군에서는 가장 기피되어야 할 어떤 파벌의식으로, 일부 장교들은, 해병학교 출신 장교에 대한 그들의 우위성을 과시함으로써 해병학교 출신들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마찰은 사실 미국 해병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었다. 이에 반하여 해병학교출신 장교들은 너희들이 뭔데 전쟁이 끝난 후에 해병대로 전과해 와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화뇌동하느냐 하는 것으로 대했다.

 

 

이런 자존심의 대결로 인하여 서로 반목이 시작되어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행태는 표면적인 것 보다 내부적으로 더욱 심화되었었다. 그것은 그들을 뒤에서 책동하는 세력, 그들의 몇몇 선배, 이 있어서 그들을 부추기고 있었는데 그 소수인원들이 편가르기의 주동적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행태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들의 옹졸한 몇몇 선배장교들에 의해 순수했던 장교들마저 그들의 농간에 넘어가 편가르기로 그들에게 이용당했고 그것이 내부적으로 해병대의 단결을 아무도 감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에 파벌화되어 균열이 가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병대 수뇌부에서 그들을 진급과 보직면에서 정책적으로 특별히 우대했었기 때문에 해병학교출신 장교들의 불평, 불만의 원인이 되어 부지 중에 해병학교출신, 사관학교출신으로 편가르기 식으로 이들의 행태가 상호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서로 놀던 물이 다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이에 대하여 해병대 수뇌부에서 이들이 상호 순화될 수 있도록 적절히 조정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이런 현상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모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결국 세월이 흐르고 그것이 토착화되면서 인제는 어떻게 할 수 없이 해병학교 출신과 해사출신으로 공공연하게 분리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이를 부정하겠지만 그들은 상류에서 흐르고 있는 물만 알고 하류의 물이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탁한 물로 인하여 얼마나 흐려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해병학교출신은 전부 보고 듣고 그리고 느끼고 알고있었으나 수뇌부에서만 모르고 있었다.

 

 

15. 미 해병학교에서의 비신사적 행위

 

(1) 구타사건

 

19547월 중순 한국에서 기초반과정 입교자들, 주로 해사출신 장교들이, 해사 4, 5, 6, 7기들, 그리고 해간 출신 장교들과 함께 이곳 미 해병학교, Camp Barrett에 도착했다.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한국을 떠나 온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하여 한국에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미 지난 6월 초에 Basic Course, 5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김종대 대위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했어야 했으나 행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솔산 전투"에서 부상당한 왼쪽무릎관절 속에 박혀잇는 파편을 아직 제거하지 못하여, 당시의 의술로서는 제거할 수 없다하여, 그 동안 그로 인하여 때때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교육 수료일 2주 앞두고 야밤에 갑자기 재발하여 이곳 해군병원에 1개월 간 입원, 수술 후 제거했지만 교육일수의 미달로 인하여 사실상의 유급으로, 한국 해병대 사령관의 승인을 득하고 재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군병원에 입원 중 한국으로 이미 귀국했어야 할 김종대 대위가 병원으로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김 대위 어떻게 된거야?"하고 물었더니 자기도 훈련 중 갑자기 발병해서 병원에 1주 간 입원했었는데 역시 유급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동반 유급당한 셈이다.

 

한국에서 온 장교들을 만난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로서는 그대로 넘어 가기에는 도저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이번 일행 중에 동기생 김 대위(해간 3)가 있었는데 해사출신으로 해병대로 새로히 전과한 해사 4, 5, 6기생, 중위들의 김 대위에 대한 태도가 선배장교가 아니라 자기들의 동기생과 같은 언행으로 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의 우리로서는 이런 행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marinekslee.egloos.com/8503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