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6]

Marine Kim 2020. 11. 1. 15:42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16]

 

 

나는 김 대위에게 이 어쳐구니 없는, 군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연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자기가 영어를 잘 못하니 그들이 자기를 깔보고 그러는 것이라" 했다. 나는 이 말 한마디에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들을 집합시켜서 그러지 말라 주의를 주었는데 전부 하나같이 묵묵 무응답이었다. 그때 나는 그들이 해병대의 기풍을 잘 몰라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주의를 주고 함께 Club에 가서 환영Party를 열려했엇는데 그들의 태도에서 나는 무슨 멸시를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해병대식으로 이들을 좀 손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김 대위에게, 당사자이기에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김 대위도 나의 생각에 동의했다.

 

 

나는 밤 12시에 그들 전원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다시 최종적으로 주의를 주었으나 역시 묵묵 무답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두둘겨 패서 듣도록 만드는 것밖에 없엇다. 1명씩 앞으로 불러내서 따귀를 때렸다. 그들은 그때 비로서 자기가 잘 못했다 햇는데 그 중 1, C 중위는 끝까지 무언으로 나의 설득에 항거했었다. 그런 자를 나는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갈겼다. 택권도로 단련된 나의주먹에 그는 견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 교육대대장(Lt. Col.)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그는 왜? 두들겨 팼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미국인으로서는 구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짧은 영어로 사유를 설명하다 결국 나는 "이번 일은 KMC 장교 간의 군기확립을 위한 행위이니 관여말라"고 말하고 대대장실을 나왔다.

 

 

얼마 후 미 해병학교에서 이곳 미 해병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해병대 장교(Sr. 과정에 1, Jr. 과정에 3)에게 이 문제에 대한 처리의뢰가 왔었다. 해병대 장교 4명은 갑론을박끝에 3 :1로 불문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여기서부터 표면상으로는 조용한 것 같았으나 해병대의 내부적인 분열, 편가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해사 출신 장교(해사 1)는 나의 본국 송환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반하여 해병학교 출신 장교들은 맞을 짓을 했으니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고 오히려 나의 손을 들어 줬다 했다.

 

 

나에게 끝까지 묵묵 무답으로 있다가 두들겨 맞은 장교는 해군병원에 며칠 간 입원 후 퇴원했는데 내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무실로 그를 병문안을 갔는데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사과처럼 부어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도 나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으나 결국 그나 나나 너무나 고지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했어야 했으나 끝까지 묵묵 무답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사실 그때부터 우리의 갈등은, 해병학교 출신과 해사 출신 장교 간의, 시작되었고 그것을 교묘히 악용하는,편가르기로, 일부 몰지각한 그들의 선배장교들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하나 나는 그 당시 내가 할 일을 했을뿐 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2) 취중 행패

 

1954년의 가을도 깊어 가고 있는 어느 날 미 해병학교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열심히 받고 있던 우리에게 예상치도 않았던 사건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곳 미 해병 지휘참모대학에서 피교육 중에 있던 우리의 선배장교인 김 중령(해사 1)이 미 해병대의 창설기념 축하 Memorial Party가 한참 진행 중에 있을 때 미 해병대 장교들과 그들의 부인들 앞에서 만취되어 미 해병장교의 부인에게 술주정?을 하다가 연락을 받고 와서 이를 제지하는 미 해병대 헌병의 따귀를 때리는 소란을 이르켰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취중행위가 때로는 용납될 수도, 또는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미국 사회에서는 자신의 취중 행위를 술 탓으로 돌리는 이런 행위자는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되게 돼 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비신사장교로 규정되어 24시간 이내에 미국에서 떠나라는 통고를 받고 다음 날 한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그의 귀국 후의 처리는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소문에 의하면 그는 귀국 후 미국인이 건방지게 굴어서 주의를 주었다고, 그의 구타행위는 빼고 자기 변명을 했다고 했다. 결국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해병대 생활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전역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미 해병 지휘참모대학 출신 동기생은 해병대 사령관까지 했었다.

 

 

아직도 편가르기?

 

심지어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전 내용이 "해병대 전투 및 해병대 해체" 라는 책자로 출판된 후 이 내용을 읽은 오래 전의 해사출신인 70대의 해병대 장교는 "왜 해사출신들만 까고 해병대의 비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까?"하는 항의를 나에게 했었는데 이는 이들 속에는 아직도 네편 내편이라는 편가르기식 오래 전의 그 잔념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더욱이 "해병대 비리는 왜 폭로하지 않았습니까?"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는 마치 자기는 해병대 장교가 아니고 아직 해사 출신 장교라는 관념이 그의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수십년 전의 사실을 그대로 언급했다해서 나에게 항의할 정도이니 그 당시의 이들이 갖고 있던 출신별, 해사 출신, 편가르기가 어떠하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반면에 해사출신, 우리가 존경하는 해병장군은 "이 대령의 심정은 이해하나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니 인제 다 지난 일들이니 잊어버리고 우리의 여생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떤가?"하고 나를 위로까지 했었다.

 

 

지난 날(한국전쟁)의 상관과의 만남

 

그 노 장군은 월남전이 한참일 때인 19652월 한국군 전투부대가 파월 되기 전, 비둘기부대(ROK-MAG)가 편성될 때 정보참모 요원으로 미 해병하교(Junior School, MCS Quantico, Va)에서 1년 간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귀국한지 6개월도 안된 나를 지명하여 파월하게 한 당시의 해병대 사령관이었다.

 

그는 지난 월요일에 여비서를 통해서 나와 시간 약속을 하고 오늘 명동소재 Lotte Hotel에서 40년만에 나를 만나고 또 나는 지난 날의 옛상관과 그 부하의 만남의 기뿜을 우리는 포응으로 나눴다. 두 노신사의 포응에 주변 사람들이 놀란 것 같기도 했으나 나는 반갑기만 했다.

 

그는 내가 한국전쟁 중 소총소대장으로서 '도솔산의 공격'목표를 공격(1951.6.7)할 당시 대대장이었으며 공격직전에 대대작전장교를 통해서 무전기로 "이번 공격에서 목표를 꼭 점령토록 하라"는 특별지시를 중대장을 제치고 직접 나에게 한 분이며 또 나를 격려해 준 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하에 있는 Buffet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는 주로 듣는 위치에서 옛상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40여 년전의 내용이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던 흥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 중의 대부분은 한국전 당시의 전쟁 이야기었으며 그 외의 내용은 우리가 평소에 흔히 들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청룡부대 파월 당시의 숨겨진 비화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거로 다시 돌아 간 듯한 기분이 되어 몹시 즐거웠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1010)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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