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4]
과연 해병대는 국민을 위한 해병대가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해병대도 호언장담만 하고 있지말았어야 했다. 더욱 겸손히 국민을 위한 해병대임을 보여 줬어야 했다. 이런 정책 수행은 지휘부의 몫이이며 또한 책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어디 갈때와 돌아 올때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속담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무슨 사연이건, 또 누구이건!
인원수는 쉽게 가감할 수 있지만 두동강이 난 해병대의 전통은 다시 접목시킨다 해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의 고위 군사정책 기획자들은 모르고 있었거나 또는 관심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안감으로 인하여 해병대를 갑자기 해체시켰을 것으로 밖에 생각 안된다.
박 정권의 속내
결국 박 정권은 그들의 정권 붕괴의 위기감으로 인하여, 당시의 혼돈된 사회상을 볼 때 정권교체라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현실적인 피할 수 없는 상황의 발생가능성을 예지하고, 해병대를 갑자기 해체시키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하므로서 그들을 견제가능한 세력을 제거하고 아울러 국민에게도 자기들의 힘의 건재함을 과시하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 추리가 맞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해병대의 해체를 별도로 발표한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병대 해체와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을 동시에 발표하는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이들을 평소에 누가 과연 설득시켜야 했었을까? 나는 묻고 싶다.
아쉽고 서글픈 일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때 경호실의 핵심 세력은 해병대 출신들이었다. 그런 그들(정인형(해간 16기) 경호처장. 안재송(해간 24기) 경호과장은 10.26사건 때 박 대통령과 함께 현장(아래층)에서 그들의 전우인 반선호(해간 16기)중정 총무과장에 의해서 사살되므로서 박 대통령(2층)과 당일 운명을 같이 했다. 서글픈 일이다. 그때 박선호는 해병대 동기생인 정인형과 후배인 안재송(해간 24기)에게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대답대신에 권총을 빼는 순간 2층에서 난 총성과함께 이미 권총을 빼고 손에 잡고 있는 박선호에게 3-4m의 지근거리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특히 안재송은 국가대표 권총선수였고 미국 해병교육단(U.S.M.C.Schools Quantico Va.) 창설 이래의 최고 권총사격 득점자(1964년 현재)로서 그의 100점 만점의 속사권총표적 아래에 "Capt. Ahn, Jae Song R.O.K. Marine Corps"라고 학교본부내에 있는 Pistol Club의 벽에 크게 벽부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 요인들은 오로지 눈 앞의 이득(정권욕)에만 집착했고 그러하므로서 만족하고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뭐가 두려웠단 말인가? 그것의 단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 유신정권의 출현이었다.
잠재적 적
그들은 물론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그들은 우리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그것은 혁명 동지였던 해병대 출신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규탄하고 그들의 대열에서 축출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이것은 해병대는 그들의 잠재적인 위협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해병대 수뇌부에선 이런 사실을 등한시 했거나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편가르기에 눈이 어두워서 사리를 제대로 못보거나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이 무엇보다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다.
이런 잠재적인 적에 대하여 해병대의 수뇌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멍청히 안일하게 현재에 안주하고 있다가 그리고 내편이 아니면 적이다 라는 우매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 안주하고 있다가 꼼짝 못하고 당하고 만 것이다. 날벼락을 맞고 쓸어진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 수록 그런 해병대 수뇌부에, 사령관 출신들에 대해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것은 50여 년 전 한국 전쟁(1952년 여름)이 치열함을 더 해 가고있을 때 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서부전선(장단지구 전투)에서 "Box Means"전법으로 중공군을 집단 도살하고 그 전과에만 만족하고 예상되는 적의 역공에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역공당하고 많은 해병들을 잃은 뼈 아픈 전례를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전사연구나 공부는 왜 하는지?
해병대는 그들의 기습에 당하고 아무 소리 못하고 해체라는, 해병대 전통의 와해라는 큰 비운 속에 빠진 것이다. 그러면 그 중단되었던 해병대의 전통을 누가 다시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의 해병대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는 노 해병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해병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과연 해병대의 전통을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는지 지난 날의 뼈 아픈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돌연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새로히 들어선 정권은 해병대에 대한 박 정권이 갖고 있던 것 같은 해병대에 대한 정권의 어떤 위기의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박 정권의 해병대 해체가 잘못되었음이 여론을 통하여 부각되었고 따라서 해병대의 재편성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은 80년대의 해병대 사령부의 재설치라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 보다 염려하고 있던 것은 해병대 사령부 재편성에 따르는 숫적 증가가 아니라 해병대 해체에 따른 해병대의 전통의 중단으로 야기되는 무엇 보다 중요한 해병 정신의 쇄퇴라는, 다시 회복시키기에는 너무나 불가능에 가까운 사실이다. 오늘의 해병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해병대의 전통은 구전이나 어떤 문서로도 계승되거나 전수될 수 없다.
해병대의 전통을 계승할 중간 허리를 국가 예산의 절감이라는 허구한 구실로 무 베듯 싹 잘라버렸으니 아무리 해병대 사령부를 재편성, 설치한들 이미 잘려나간 허리는 원 상태로 회복될 수 없고 또한 잘려진 반토막을 접합시킨들 온전한 해병대의 전통은 회복되거나 또는 계승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같은 아이들의 작난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짜인 위조품(Counterfeit)을 진품인양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모든 해병 가족들은 이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Motto에 있는 것 같이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Motto를, 미 해병대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하지 않은가?
그것은 국민과 정부에 신뢰받는 해병대가 돼지 못 해서 일것이다. 특히 정권에 의해서 두려운 존재로 경계의 대상이 돼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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