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9]
17. 공정성이 요구되는 인사정책
나는 이런 장차 예상되는 대립과 마찰에 대해서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 참모장(김두찬 준장)에게 해병학교 사관후보생 중대장(당시 소령)을 하면서 해병학교로 의탁교육 온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행태를 관찰한 결과와 미국 해병학교에서의 이들의 언동 등을 보고하고 이의 시정을 건의 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참모장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고만 있었다. 아마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였을 것으로 나는 그의 웃음을 보면서 느꼈고 동시에 그의 표정을 통하여 별수 없구나 하고 실망했다.
이런 중요한 인사 정책의 변화는 당시 해병대 수뇌부의 결정이었는데 그들은 그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있었다. 그것은 해병학교출신과 해군 사관학교출신 간의 비율의 적당한 조정과 운영이었는데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근시안적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어서 군에서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진급과 보직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노골화되어 차등이 보이므로서 해병학교출신 장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며 그 골이 점차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편파적인 인사정책의 결과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수뇌부에서 과연 알고도 모른척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아주 중요한 사항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화합과 단결이었다. 그 결과가 해병학교출신과 해군 사관학교출신의 편가르기식 분열 현상으로 표면화되었다.
결국 이런 분열현상은 해병대 수뇌부의 편파적인 인사정책의 산물이었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좀 더 큰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그것이 해병대의 단결을 내부적으로, 점진적으로 와해시키고 있었음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고있었는지 또는 알고도 모른척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편파적인 인사정책이 해병대 해체 시까지 계속 됬었다. 추측컨데 지금은 그들이 키운 나무의 뿌리가 더 커젔는지 또한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해병대의 정신과 전통을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편파적인 인사 정책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들의 심복이, 자기들의 편이 되어 줄것을 원했다. 이런 흐름은 해병 정신의 쇠퇴와 해병대 전통의 순수성과 단결력을 잠식하는 독소적 역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많은 장교들이 이런 굴욕적인 편 가르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 선상에 있지 않으면 눈에 보이게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 이다.
어떤 연대장
나도 50년대 후반에 제2연대에서 참모로 2년간 근무한 일이 있는데 그때 어떤 연대장으로부터 자기의 심복이 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나는 그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상당기간 그 연대장에 의해 그리고 그를 통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은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도대체 군조직에서 일개인의 심복이란 있을 수 있단말인가?
심지어 나는 그를 권총으로 사살 하려한 일도 있었다. 나에 대한 연대장의 악의적인 태도 중의 하나를, 아주 극단적인 실례 중의 하나를 들게되면 2연대가 김포지역에 배치되어 있을 때 일반참모는 부연대장의 차량운행증에 결재만 받고 계획된 외박일에 서울로 Jeep로 외박 나가도록 연대장이 이미 결재해 놓고도 다른 참모들은 외박계획표에 따라 외박 나가는데 나만은 일반 민간 버스를 타고 외박 나가라 하니 도대체 이런 지휘관이 어느 군대에 있을까?
그래서 연대장에게 이유를 문의하니 "이유없어 이것은 명령이야 너만은 안돼" 이것이 연대장의 답변이었다. 폭군도 이런 폭군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만주군에서 만군장교로 있었을 때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자는 장교가 돼서는 안될 자였다. 그것도 자기의 심복되기를 거절한 나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더라도 은연 중에 표시하여야 하는데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의 언행으로 자기의 참모인 나를 공개적으로 차별하는데에는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 내용은 나의 저서"노 해병의 어제와 오늘 (2002년8월15일 발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그는 소장까지 됐으니 나의 그로 인한 힘든 군 생활은 오래 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중령진급도 1차 누락 된 일도 있다. 대신에 심복이 됀 장교들은 승승장구 하는 것을 나는 보았는데 정말 눈꼴이 시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인생은 이들 처럼 약게 살아야 되는가? 하고 자문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런 교활한 생활방식은 전혀 맞지 않으니 나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 자신이 대인관계가 좋을 뿐만 아니라 교제술이 능해서라고 스스로 그들의 가식된 언행을 자기변명하고 있었다. 이런 행태는 부대의 단결을 와해시키고 네편, 내편으로 오히려 부대를 갈라 놓아 부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큰 장애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엇 보다 모든 지휘관들이 명심하여야 할 사항이다.
지휘관
지휘관은 만사에 공정해야 하며 또한 솔선수범으로 부하에게 믿음을 줌으로서 그 부대원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따라서 전투력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휘관에게 있어서 부하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그 부하에게 믿음을 못 주는 지휘관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해병대 생활을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한 모든 강직한 장교들은 군 생활 중 이런 옹졸하고 편협한 지휘관을 보았거나 또는 그런 지휘관에 대해서 들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런 시련을 통해서 자기개발을 도모할 수 있으며 또한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 박정희 대통령의 과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보다 그의 잘못된 정치적 야망과 그의 주변의 소인배들의 농간에 해병대의 전통을 중절시켰지만 결국 그는 비명에 갔다. 이것이 국가적인 손실인지 아닌지는 후세에서 판단하고 평가하겠지만 특히 그의 해병대 해체는 잘못이었음이 그의 사후에 현실로 대두되고 있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5.16 군사 구테타에 성공하고 그 이후 그 구테타의 주역이었던 해병대 출신들을 반 구테타로 축출하고 또한 그 해병대를 해체했음이 과연 그의 올바르고 정당한 결정이었을까?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다. 그의 비운이 우리 해병대의 입장에서는 자업자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이 그때의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같은 군 출신으로서 나는 슬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의 국가를 위한 경제발전의 큰 업적에 비해 그의 최후가 너무나 안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사자 보다 그의 주변의 소인배들이 더욱 미웠을 뿐이었다
19. 해병대의 해체
1973년9월30일. 이 날은 나의 해병대 장교로서의 웅지를 해병대의 군복을 벗음과 동시에 버리게 되는 날 이다. 또한 나의 23년 간의 피나는 노력과 파란 많았던 해병대 생활의 마지막 날 이기도 했다. 해병대 생활 30년 계획이 23년으로 끝났으니 정말 아쉽고 서글프고 또한 원망스러운 날 이기도 했다.
나는 36세의 나이로 해병대 대령으로 진급하고 43세로 민간인으로 돌아 갔다. 이 나이로, 이 젊음으로 군 생활을 끝낸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했다. 그 동안 남달리 힘쓰고 애쓴 모든 나의 노력이 타의에 의해 허사가 되고 힘들여 쌓아 올린 나의 공든 탑도 일 순간에 소리도 없이 타의에 의해 무너지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말 나같이 시운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0회까지 계속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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