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20]
20. 나의 모든 노력은 해병대를 위함이 었다.
나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했다. 해병대 장교 중 도미 유학도 제일 많이 했다. 미국 해병대의 Basic School(1954년). Junior School(1963-4년).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1961년).그리고 우리 해병대에서 최초로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 대학(U.S.Army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 정규과정(1968-9년)을 졸업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장교들이 하지못한 일도 해냈다.
(1) 1961년 5월 나는 결혼일을 2주일 앞두고 해병대에서 처음 가는 미 육군 특수전 학교에 특수훈련이라 해서 입교희망자가 없어서 도미유학시험에 응시도 하지 않았는데 사령관 지시로 5일만에 유학 수속을 마치고 육군 공수단 장교(대대장) 2명과함께 도미유학을 떠난 일도 있다. 이건 순 강제 군사유학이었다.
5.16 군사구테타의 소식은 미국 San Francisco 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Hotel lobby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 놓여있는 신문일면에 한국 지도가 크게 난 것을 보고 알게 됐다. 물론 결혼식 청첩장도 준비해 놓고 결혼식을 연기했었다.
(2) 1965년 1월 중순 한국군 최초 파월(주월 한국 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 때도 1년 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5개월밖에 안됐는데 진해로 해병대 사령부 인사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중령, 월남 안가겠어?" 무슨 홍두깨같은 소리인지 나는 이해가 안 갔다. "왜요?"하고 나는 반문했다.
인사국장은 "지금 사령관님(공정식 중장)을 모시고 회의 중인데 월남에 한국군을 파송하는데 해병대에서 중령을 보내게 돼 있어서 인선 중 이 중령이 가장 적임자로 지명됐는데 가겠어?"하고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는데 "지금 전화상으로 결정 해"라고 인사국장은 말했다. 이럴 때 독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외국으로, 그것도 전쟁 중에 있는 월남으로 가는데 동네집으로 놀러가는 것 같이 지금 당장 결정하라니 정말 이런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은 몇년 전 미 육군 특수전학교로 급히 유학 갈때 보다 더 급한 요구였다. 이런 경우 가족하고도 의논할 시간도 필요했으나 나는 그런 시간 여유도 없이 "예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처와 둘이서 이삿짐을 꾸리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이사 온 일도 있다.
이때 나의 처는 내색은 않했지만 속으로는 꽤 나를 원망했을 것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1965년2월21일 오산 공군 비행장에서 미군 C-130 수송기편으로 새벽 4시에 한국을 출발하여 당일에 전쟁 중에 있는 월남의 Saigon에 도착한 이후 "주월 한국 군사원조단" 의 정보참모로, 전투부대가 파월 되었을 때는 "한국군 사령부"에서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고 1966년3월6일에 나의 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사령부 신사국장(이홍균 대령)은 나에게 "무슨 보직이건 원하는대로 발령하겠으니 말해"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했을뿐인데 특별히 희망하는 보직은 없다고 대답했다. 이 순간 인사국장의 표정이 이상하게 이그러져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사국장실에서 나왔다.
몇일 후 청룡부대의 교대병력을 훈련시키는 특수교육대가 편성되어 그 신설부대의 지휘관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나는 그직책을 2년 간(1966년5월-1968년6월) 나의 최선을 다 하여 수행했다
(3) 1962년 "국군의 날 행사"에 해병 부대의 선두에서 행진할 수색중대의 중대장이 대위인데 중령인 나를 행사 중 수색중대장으로 사령부에서 임명하기도 했다.
(4) 1963년4월15일은 해병대 창설 15주년 Memorial Jump.
나는 이때 지난해 8월초부터 이곳 미국 해병학교(Junior School Quantico Va.)에 재학 중에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 창설 15주년기념일을 축하하는 기념Jump를 하기위하여 학교본부에 Helicopter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학교본부에서는 학교 개설이래 외국장교로서는 처음이라면서 쾌히 승낙하고 Helicopter와함께 나와의 동반Jumper로 Maj.Kelly(80년대 초 미 해병대 사령관)를 주선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 훈련장에서 동반하여 1.250feet 상공에서 Jump했는데 이 내용이 학교신문인 Quantico Sentry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이 알게된 일이 있었다. 이거 역시 한국 해병대를 세계에 소개하기 위한 나의 노력의 일부였다.
(5)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 직후 서해의 00지점에 무장공비의 상륙 가능성의 정보보고(합참)에 의해 청룡부대 교대병력의 훈련 책임을 맡고 있던 특수교육대장인 나에게 보병연대장들이 3명이나 있었는데 그 지역에 대한 무장 수색정찰임무가 부여되어 나는 장교 3명과 수색중대 하사관 6명을 인솔하고 공군의 Helicopter와 함께 해군 함정의 지원하에 그 지역 일대를 눈 속에서 3박4일 간 잠복, 수색정찰한 일도 있다.
(6) 1970년에는 진해에서 해병대학 총장을 하고있던 나에게 서울, 해병대 사령관실 부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령관님께서 이 대령님 곧 서울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왜 나를 오라 하시지?"하고 부관에게 물었는데 자기는 그 내용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다음 날 "CESSNA"(민간상용 4인승)를 타고 서울로 가서 사령관(정광호 대장)을 사령관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사령관은 나에게 "이 대령, 각군 대항 체력경연 대회에서 해병대 팀이 작년에 3등을 했으니 해병대 팀을 잘 훈련시켜서 1등을 시켜봐." 이것이 사령관의 지시사항 전부였다. 나는 이렇게 사령관의 직접지시를 받고 선수들을 1개월동안 강훈련시켜서 1등을 한 일도 있었다.
이 행사는 연례행사였는데 경기 종목은 100m달리기, 5.000m달리기, 넓이 뛰기, 턱걸이, 수류탄 던지기 및 쌀가마니 메구 뛰기 등 6종목이었다. 이때 나는 선수를 장교를 제외하고 전원을 해병대 야구부선수로 교체시키고 진해에서 1개월 간 강훈련을 시켰다. 그 인원 속에는 김우열 해병(후일에 OB의 야구선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때 바싹 야위어 있었다.
그 대회에서 해병대 팀은 4.500점 만점에 육군 팀에게 8점 차이로 분패했으나 다음 해 다시 훈련시켜서 참가 해 무려 300점 차이로 육군 팀에게 압승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다음 해부터 그 연례행사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나는 이렇게 약국의 감초겪이었다. 물론 나도 피곤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나는 나의 하는 일들에 대해서 항상 보람을 느끼면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엇이 건 최선을 다 했다. 그래서 칭찬을 듣기도 했고 따라서 나는 해병대내에서 유명해졌다.
21. 청와대의 선심
전역식 후 사령관실에서 사령관으로부터 청와대 발행 200만원 수표를 주고 받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받고 악수하고 우리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해병대를 영원히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해병이 되었다. 그러나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임을 자부하면서 우리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 갈 것을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청와대 수표는 유난히 작았다. 명함 크기의 절반 정도였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해병대 해체에 따르는 무슨 연민의 정에서 일까? 또는 후환이 두려워서 일까? 자기를 오늘이 있게 해 준 해병대 현역군에 대한 미안함에서 일까? 수표의 금액은 대령은 200만원, 준장은 300만원 (당시 반포 Apt.36평의 시가는 250만원 정도)으로 계급 순에 따라 액수가 증가 했다. 이것은 퇴직금이 아닌 위로금으로 우리에게 지급되었다. 거기에 추가하여 취업 희망자에게는 국내 대기업체의 부, 차장으로 취업을 알선해 준다고 했다.
나는 대한항공으로 취업이 되어 10년간 근무하고 하나님의 사업(여전도사 교육)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13년 동안 여전도사 교육에 전념하여 166명을 졸업시켰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 하고 있다. 그들 속에는 선교사도 있다. 이들은 나의 만년의 보람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15년 간 나의 최선을 다 해서 특별히 한국 전쟁 중 내가 위기 속에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주신 그 고마우신 하나님께 봉사하고 2002년2월24일 고희로 은퇴 후 원로 장로가 되어 지금은 예수님의 교회("선한 목자교회" 경기, 성남시 복정동 소재))를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됨을 감사하며 나의 만년을 살고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해병대 장교가 될 것이다. 끝.
*출처 : 해병대 해체: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by oldmarine
2007/11/16 00:17
해병대 해체(1973.10
marinekslee.egloos.com/850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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