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1]

Marine Kim 2021. 1. 2. 10:30

Marine story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1]

 

이 글은 이 blog의 독자, 특히 해병가족들(현역장병)에게 한국전쟁 중 가장 어려웠던, 지역적으로 오지에 위치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 해병 제1사단의 동계작전인 "장진호 전투"를 소개하므로서 오늘의 해병들의 전투정신을 보다 강하게, 보다 철저하게 함양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자료를 제공하는 데 이 내용의 목적이 있다.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부대에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던 제2대대의 F 중대를 직접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한 제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Lt. Col. Raymond G. Davis)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1개중대의 병력으로 1.000여 명의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제2대대 F 중대 중대장 '발버' 대위(Capt. William E. Barber)의 용감한 전투지휘 중의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최고훈장인 'Congressional Medal of Honor''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백악관에서 수여받은 모든 해병들의 귀감이 되는 '데이비스' 대대장(후일에 미 해병대의 부사령관)'발버' 중대장을 소개하므로써 해병대 장교들의 전투의식에 강인성을 추가하며 또한 전우애(상경하애)의 정신을 본받는 자료를 제공하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고 있다.

 

 

1. "장진호 전투"의 성격: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영하 -20(주간) -32(야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 병력대비 10:1)와의 전투로서 세계 2대 동계 전투로, 또한 한국전쟁 중의 10대 전투로 기록된 전투이다.

 

 

전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1단계는 19506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한 개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

 

2단계는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시점.

 

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되었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기형적인 전투가 지속되었던 시기.

 

 

2. "장진호(長津湖) 전투"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ior) 지역.

 

"장진호 전투"(1950.11.27~12.11)6.25 전쟁의 제2단계에서 1950915일 미 해병 제1사단을 주축으로 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38도선을 돌파한 UN군이 북한의 '청천강' 이북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대병력(12만명)에 의해 후퇴하게 되는 195011월하순 서부전선의 "청천강 전투"와 연결선상에 있는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의 격전지(張津湖주변 지형)

 

 

전쟁초기 '청천강'유역의 서부전선에는 미 8군 휘하의 미 제1군단(미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영 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 9군단(미 제25보병사단, 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예비대로 미 제1기병사단과 영 연방 제29독립보병여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도강하는 중공군 (安東) - 1950.10.14 -

 

이때 미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미 제10군단(미 해병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27일로 정하고, 미 해병 제1사단에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미 해병 제1사단의 제5 및 제7연대는 1125'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112811. 양개 연대장(미 해병 제5 및 제7연대)'무평리'의 공격은 물론 현진지의 고수도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담리'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기로 합의하고 방어진지를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30일에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됨에 따라 양개 연대장은 121,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12,000)은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친 사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릎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UN공군(미 해병 제1비행사단의 근접항공지원기 Corsair 함재기)의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3. 미 해병 제1사단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 해병 제1사단은 19501026'원산'에 행정상륙한 후,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고 "장진호(長津湖) 작전"에 투입된 112일 함흥 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야간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치열한 근접전투 끝에 중공군 7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미 해병 제1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고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를 점령하였다. Hagaru-ri,

 

'하갈우리'는 상륙항이었던 '흥남'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하는 '개마고원'지대로서 해발 고도가 1.000 - 2.000m'낭림산맥(狼林山脈)'을 따라가는 고산지대였다.

 

이로 인하여 '진흥리'부터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기복이 극심한 협곡도로로 인하여 전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며 오히려 우마차의 통행은 가능할 정도였다. 또한 이때부터 작전지역에 눈이 쌓였고 야간에는 수은주가 영하-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시작됨으로 인하여 지형과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20,26,27)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2개연대(5 7연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4개 사단이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30일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제5 7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30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 제1사단의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 by oldmarine (사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