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2]
4. 전투현황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의 전투일지
중공군은 미 해병 2개 연대에 대하여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 주변일대에 종전의 4개사단에 추가하여 5개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 '고토리', 및 '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1) 미 해병 제1사단장(오리버 P. 스미스 소장)의 결의
이에 대하여 UN군측에서는 극동군 수송 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이 해병 제1사단장을 방문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수철수를 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 제1 사단의 스미스 사단장(M/G Oliver P. Smith)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하며 이 제의를 거절하고, 육로철수를 결정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스미스' 사단장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지역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결심을 굳힌 사단장은 각제대가 철수준비를 하는 동안 장병들에게 "사단은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공격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장병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들은 철수 간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질서있는 철수로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했다.
그때 스미스 사단장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후퇴라니!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 "Retreat Hell! We'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 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때 해병 제1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중공군은 전사 2,500명과 부상12,500명의 손실을 당했다. 이로 인해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2) 전투성과
중공군의 '3차 공세' 저지 및 UN군의 반격의 기틀을 마련: 이 전투결과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 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 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휘관의 결단
이때 만일 미 해병 제1사단장이 UN군 사령부의 요청대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공수로 병력만 철수했으면 중공군 제9병단은 '수원'지역 일대에서 차후공격을 위하여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의 주력부대에 합류하여 계속 남진했을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거기서 끝났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 한국국민은 미 해병대뿐만 아니라 미 해병 제1사단장의 역경 속에서 대한민국을 위한 용기있고 올바른 결단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되며 또한 그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Box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음.
동부전선에는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미 해병 제1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여 "장진호(長津湖)작전"에 투입된 11월 2일, '함흥'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동부지역에서의 중공군의 1차공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5. "장진호 전투"의 의의
실제로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만일 미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 전투이자 한국전의 10대 전투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전투를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Chosin Reservoir)"지역에서 철수 중인 이때의 대기온도는 주간은 영하-20도, 야간은 영하-32도인 혹한이었다.
(1) 중공군 제9병단의 궤멸
한국전쟁에 투입된 중공군 사단병력은 서부전선에 18개사단, 동부전선에 제9병단의 12개사단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맞섰던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사단 중 8개사단을 투입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 및 차단하였지만, 해병사단의 강력한 화력과 강인한 전투력에 의해 돌파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원손실을 입고 궤멸상태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3월의 마지막 주간까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철수과정에서 수송기로 철수하지 않고 정상적인 지상철수를 하면서, 부대건제를 유지하면서 중공군 제9병단에 가한 치명적인 손실은 중공군 전체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인하여 "UN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느냐, 계속 주둔하느냐?"의 기로에 있었을 때에 1월 및 2월의 중공군 3차 및 4차공세(정월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의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일 중공군이 제9병단을, 중공군 전체병력의 40%, 투입하여 금강, 또는 대전선까지 진출하였다면, UN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철수하거나 또는 한반도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자료를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미 해병 제1사단의 선전은 "한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미국 대통령의 치하
2004년 12월 7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진주만' 피습 63년을 맞아 이라크 파병 미 해병 제1사단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Camp Pendleton을 방문한 석상에서 한국전쟁 당시 해병 제1사단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에 대항하여 싸운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들의 용맹했던 전투를 치하한바 있다. 이때 중공군에 대항하여 전투한 병력은 UN군 20.000명(미 해병대 17.000명, 영국군과 미 육군 3.000명) 이었다.
(3) 미국 해병대의 증강.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미 해병대의 상비 병력수는 75,000명이었으나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종료될 당시에는 총병력수는 281,000명으로 증원돼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예비역들이었다. 한국전쟁 중 미 해병대의 병력손실은 30,544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으며 기간 중 42명에게 미국 최고훈장이 수여되었다.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의 전경(사진생략)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 by oldmarine (사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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