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본당의 설립과 발전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그렇게 되면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져 서로 방문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그때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 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였으며, 교우 총수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소에 있었기 때문에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면서 사목하였다. 이와 같이 공소를 순방하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모바일용 요약 설명
원주교구의 주교좌인 원동 성당은 1896년 8월 17일 풍수원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된 원주 본당을 그 모태로 합니다. 1902년 드브레 신부 때 신자들의 증가로 인해 사제관 부근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날의 성당 터전을 마련하였고, 1904년에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였습니다. 1913년 조제 신부가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하여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고, 1950년 디어리 신부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성당과 1934년에 설립된 소화유치원이 전소되었습니다. 본국으로 갔다가 1951년 10월에 돌아온 디어리 신부는 교우들과 함께 성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1954년 9월 120평 규모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1971년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부정부패 규탄대회가 원동 성당에서 열리고,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개최됨으로써 원동 성당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1990년 8월 기념 교육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갖고, 1995년 성당과 수녀원 등을 보수하여 이듬해 10월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원동 성당은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을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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