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3-1]
●駐韓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
국방예산의 72.4%를 美 원조로 충당
1960년대 중반 북한군의 능력은 한국군을 거의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국방을 위해 투자할 경제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의 원조로 국방예산을 편성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한국 정부 예산의 52%, 국방 예산의 72.4%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었다. 駐韓美軍의 존재와 미국의 군사원조가 한국 방위의 모든 것이었다.
미국이 월남전이라는 진흙탕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서, 한국 정부는 「혹시 駐韓美軍이 월남으로 빠져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됐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1년 11월 케네디 美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먼저 제의했다. 한국군이 한국의 방위도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파병제안을 한 것은 「美軍이 한 명이라도 한국에서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케네디 美 행정부는 1963년 여름 한국 정부에 「월남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1964년 5월 존슨 美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 25개국에 월남전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朴대통령은 이미 마음속으로 월남 파병을 결심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미국의 요청을 받고 한국 정부가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朴正熙 대통령이 월남전 파병을 결심하는 며칠 동안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하루에 몇 번씩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를 비웠다」는 일화는 월남전 참전 결정 과정의 고뇌를 말해 준다.
1년 내내 찜통더위가 계속되는 나라,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라, 敵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쟁터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병해 피를 흘리게 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대통령이라도 고뇌 없이 참전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월남 파병을 결정한 朴正熙 정부가 염두에 둔 두 가지 전략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파병을 통해 국가안보를 확실히 하고, 둘째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는다는 것이었다.
월남 파병은 6·25 당시 미국의 참전에 대한 報恩(보은)인 동시에 韓美동맹을 좀더 긴밀한 관계로 격상시키고, 駐韓美軍의 월남전 차출을 방지하는 현실적인 代案이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명 정도의 병력을 파견한 기간에 韓·美 관계는 韓美동맹 역사상 최고의 밀월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했다.
국방군사연구소의 최용호 박사는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국가의 안보와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할 朴正熙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반대급부로 활용한 국가전략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월남 파병의 代價
월남전에 최초로 파견된 한국군은 1964년 7월15일 창설된 제1이동외과병원이었다. 그해 9월11일 부산을 떠난 제1이동외과병원은 9월28일 붕타우의 월남군 육군 요양병원에서 시무식을 갖고 駐越 한국군으로서 첫 임무를 시작했다.
월남에 파견된 2차 한국군 부대는 건설지원단이었다. 1964년 12월18일 미국 정부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통해 한국군 공병 1개 대대와 의무지원단(야전병원)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65년 1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월남 파병 건설부대가 창설 되었다.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3월10일 인천港(항)을 출발해서 3월16일 사이공港에 입항했다. 비록 건설부대이기는 했지만 비둘기부대는 自衛(자위)를 위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주변지역을 진지화했다.
월남전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미국은 1965년 3월8일 다낭에 첫 번째 지상군 전투부대를 상륙시켰다. 같은 해 5월 韓美 정상회담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월남 파병을 공식으로 요청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파병을 결정한 朴대통령은 다급해하는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파병에 따르는 몇 가지 반대급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駐韓美軍의 철수時 반드시 한국과 事前(사전) 협의한다.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확대한다. ▲개발 차관으로 우선 1억5000만 달러를 배정한다. ▲주둔군 지위 협정(SOFA)을 체결한다는 것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전투병 파병의 代價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한국의 안보를 더욱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韓美동맹을 상호의존 관계로 격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해병대, 세계를 놀라게 해
1965년 9월25일 駐越 한국군사령부가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육군작전참모부장 蔡命新 少將(소장)이 초대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월남에 제일 먼저 파견된 한국군 전투부대는 해병 여단인 「청룡부대」였다. 1965년 10월8일 베트남 중부의 캄란灣(만)에 도착한 한국 해병의 청룡부대는 주둔지인 동바틴으로 이동해 1번 도로 및 철도의 방어 임무 및 對게릴라戰 임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월남에 파견된 한국군 전투부대는 육군부대인 「맹호부대」로서 10월22일 월남의 퀴논港에 상륙, 빈딘省 주둔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1966년 9월엔 「백마부대」가 파견되었다. 1966년 이후 월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1972년까지 약 4만5000명 선을 유지했다.
한국군은 1973년 3월 월남에서 완전 철군하기까지 8년 6개월 동안 군단급 작전 4회, 사단급 작전 30회, 연대급 작전 186회, 대대급 작전 955회와 중대급 이하의 소규모 작전 57만6000회의 전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까투산·자빈동 전투 등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다. 프랑스軍이 여덟 번이나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월남군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던 까투산을 한국 해병대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장악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독자적 작전통제권 행사
월남에서 한국군은 駐越美軍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美軍은 한국군을 자신들의 작전 통제下에 두기를 원했지만, 한국군은 「월남전은 군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전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한국군은 필요할 때 美軍의 지원과 협조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양 국군 사이에 「우리는 동맹」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미군과는 색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미군의 월남전 전략 개념이 「강력한 기동 타격대로 베트콩을 찾아내어 격멸한다」는 개념인 데 반해 한국군은 「좀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주민과 베트콩을 분리한 후 분리된 베트콩을 枯死(고사)시킨다」는 것을 작전 개념으로 삼았다.
미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서는 대부분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는 패했다. 만약 미국 측이 한국의 전략개념을 따랐더라면 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월남 사람들이 좋아했던 외국 군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월남전에서 우리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참전 연인원 32만5517명 중 전사 4601명 등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에 이르렀다.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 등에 시달리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수만 명 이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희생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급속한 군사 현대화 및 경제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이 국가안보에 대한 기여는 무형적인 것이기 때문이 수치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한국이 월남전 참전을 통해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자료들로 증명할 수 있다.
월남전 참전 기간 북한 경제 압도 시작
우리나라가 월남에 본격적인 전투 부대를 파병하던 1965년 한국의 GNP는 1억500만 달러로, 1억6200만 달러인 북한의 약 60%에 불과했다. 북한은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에서도 한국보다 앞서 있던 상황이었다.
월남전 참전 기간에 한국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969년에는 GNP가 2억1000만 달러를 기록, 북한의 1억9500만 달러를 능가했다.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한 1973년, 한국의 GNP는 3억1900만 달러로 북한의 1.1배에 이르게 되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국가의 경제력은 정체되거나 가라앉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월남전을 경제 발전의 특별한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아무튼 월남 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들은 통일 이후 거의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열에 놓여 있었다.
이제 베트남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미국 군인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다시 월남을 드나들고 있으며, 한국의 기업들도 많이 진출해 있다. 이제 월남은 먼 길을 돌아 자본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월남전 참전 한국군 용사의 아들딸들은 이제 북부 월남의 요새였던 하노이 관광을 즐기게 되었다.
한국의 월남전 파병의 역사를 빛나는 역사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이 처한 국제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에서 한국은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며, 그 결정은 역사에 의해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출처] 駐韓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작성자 오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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