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 전투의 전우들 11

Marine Kim 2021. 1. 16. 15:10

Marine Story

푸옥록 전투의 전우들

 

그 때 3대대 9중대에서 지난 19661120일 푸옥록 전투의 악몽이 떠올랐던 겁니다.

눈앞에 오리걸음으로 적들이 다가 온다.

중간 중간에 있는 공동묘지 비석 뒤로 까만 그림자가 숨었다 또 다가오기를 되풀이한다.

 

아주 가까이 20미 터 전방까지 적이 다가왔을 때 이었다.

내가 쏘아대던 M2 칼빈소총이 사격도중에 고장이 났다

방아쇠를 당겼더니 불발이다. 노리쇠가 노리쇠홈 중간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명탄이 꺼저 칠흑처럼 어두웠기에 적들이 나를 못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가깝게 적이 있으니 권총을 손에 잡고 적을 응시 하였다.

 

비석 쪽에 서너 발의 권총을 쏘고는

젖은 군화 발로 들어 누운 채로 노리쇠를 발로 차서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후퇴시키고 또 약실에 발로 차서 집어넣었다.

또 다시 발로 차서 탄알을 제거하기를 세 차례 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나?

진흙투성이의 M2칼빈의 노리쇠를 군화바닥으로 찼더니 연발 사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적에게 연발로 난사하고 몸을 날려서 60미리 박격포탄 박스 뒤에 몸을 숨겼다.

 

다시 전투는 계속하였다 .

 

어찌나 몸이 닳았는지 총을 쏘면서, 엎드린 채로 바지를 입은채로 소피를 보았다.

빗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바지를 총알이 날아오는데서 벗은들 어찌한단 말인가?

, 불안하고 초조한 순간에 바지 속 허벅지 사이에서 느끼는 배설의 따스함이여...!

 

그 때는 정말 감사하였다 미제는 도 좋다는데

Colt병기창에서 만든 M2칼빈이 우수하기는 하구나 - "쌩큐, 쌩큐"

오죽 다급 하였으면 관축장교인 내가

칼빈소총 고장이 나서 다가오는 적에게 권총으로 응사를 하였을까?

 

그러다 보니 앞에 있어야할 전창우 소대장(9중대 1소대장)이 후방으로 후퇴하고

내가 최 첨병이 되었다.

잘못하다가는 우군 총에 맞을 지경이었다.

에구 이런 변고가 있나?

허겁지겁 포복으로 1소대에 합류해야하는 변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외톨이 관측 장교가 되는 걸 겁내기 마련이었다.

이때 관측병은 관측장교가 전사였다고 간주하고 중대본부와 합류하였으며

나와 떨어져 다니는 외로운 오리새끼가 되었다나요?

나만 혼자서 소총분대와 함께 최전방에 소총을 쏘며 포탄유도를 하였던 악몽같은 기억이 떠오를 겁니다.

 

[출처] 푸옥록 전투의 전우들 |작성자 오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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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만난 푸옥록30고지 전투의 전우들

 

현충원 기념행사를 마치고 해병대들이 모여있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예비역 해병대 중에서도 가장 활동이 활발하다는 177기동기들의 모임을 찾아가서

이승환(: 9중대3소대)전우와 조윤근(: 9중대1소대)을 만나 기쁨을 함께하였습니다.

이 전우들은 푸옥록30고지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며 싸웠고 들개처럼 처참하게 수렁같은 진창의 흙속에서도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짜빈박의 슬픈 추억이 있다지만 추억을 잊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생사를 같이한 장하고, 고마운 전우님들 감사합니다.

 

김세창: 해병대의 전사에서 짜빈동 대첩(1967.2.15)을 제일로 꼽습니다.

그러나 철조망 한 줄도 없는 30미터 고지의 좁은 공간에서

월맹군 2개 대대(48대대와 46대대)2시간 30분의 혈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청룡 제3대대 9중대의 위업은 숨겨져 있습니다.

해병전사의 찬란한 별과 같은 값진 승리였는데 말입니다.

 

이 용감하고 지혜로운 방어전은 다시 월남전사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전공을 무시당한 것 같은 허전함과 소외감들이 이 두 전우의 가슴에도 깊은 상처로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산화하신 하사 정장생외 10명의 전우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06/07-05:04]-

 

푸옥록 고지의 전투

 

글 내용에 갑자기 짜빈동 작전 이전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혼돈이 있을것

같아서 댓글을 답니다.해병의 청룡부대 작전 기록에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찬란한 전력이 있습니다.

 

불과 2개소대의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1개대대와 싸워서 승리한 전투입니다.

실제는 적군 2개대대가 참전하였으나 나머지 1개대대는 모루 망치전법으로

해병대 9중대가 후퇴하면 전멸시키겠다고 후방 매복을 하고 있었기에 직접

전투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해병9중대는 짜빈동과는 달리 아주 열악한 방위조건으로 부대주변에

장애물이나 교통호도 없는 허허 벌판이나 다름없는 월남 공동묘지에서 적과

정면으로 전투를 하였습니다.

 

이 또한 기적이었고 해병대 상급부대에서 사실을 상세히 밝히고 국민들에게도

낱낱히 밝히었다면 어떤 면으로는 오히려 짜빈동 보다도 더 훌륭한 전투로

각광을 받을 전투었다는 생각도 드는 전투였습니다.

이 때 외톨이가 되어서 포탄 유도도 하고, 적과 직접 소총사격을 하며 싸우던

외로운 관측 장교의 공포의 순간들이 짜빈동 전투에서도 나타 나는것 같은

두려움을 표시한 겁니다.

 

 

 

[출처] 현충일에 만난 푸옥록30고지 전투의 전우들 |작성자 오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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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 3대대9중대 푸옥록 전투는 월맹군 대부대의 최초의 접전과 최대의 희생을 초래한 기념비적 대승.

 

이 전투 전과를 정정하고 싶습니다.

당시 9중대확인 94()와 추가로 1대대2중대가 추가 확인한 16명포함하면

110명을 사살.포로1,귀순자1명입니다.

참전자 이름도 정정합니다 .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이 맞습니다다.

3소대장 이름도 전창우 소위(짜빈박전투에서 전사)로 정정합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월맹정규군 2개대대(48 대대와 46 대대 )의 협공이 있었고

지방 게리라인 베트콩이 보급지원을 하는 합동작전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9중대 병력은 2 개소대(1소대,3소대) 병력과 포병관측반(관측장교 김세창외 2),

지원병력(미해병대 앵그리코 반 2,81미리 박격포반장 박윤철하사외 3, 월남 통역 2 ,) 두 합해보면 80여명 정도였다.

 

당시해병 포병 대대(2808부대)의 역활 또한 막중하였는데 적들의 후방지원부대와

은밀하게 접근하려던 계곡 내의 민간인, 여자 보급 지원부대들을 괴멸하였다.

이 때문에 제 3 소대장이 소대원과 함께 육박전이 있었던 곳에 적들의 추가 지원병력이

완전히 차단 되었고, 소대장과 함께 전투하던 본인도 무사할 수 가있었습니다.

 

청룡부대 중대단위 전투로는 짜빈동 대첩보다 3개월 먼저 이룬 110여명을 사살한 전과인데 용안작전기간이였기 때문에 청룡 9중대의 대승이 뭍혀져서 알려지지 않은 애석함이 있습니다.

 

당시에 196611월 말 동아방송(지금은 없음)에서 1시간이 못되는 진중 interview가 있어서 한국에서 공중파로 방송되었습니다. 오해병이 올린 9중대 사진은 동아방송과 인터뷰한 직후에 여단본부 정훈참모와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입니다 .

 

참고로 이 전투에서 맹 활약을 하였던 1소대장 김원식 소위(해사20, 중령예편)" 해병, 그대 청룡의 기백으로 !" 의 현재 회원입니다.

 

[출처] Re:청룡 3대대9중대 푸옥록 전투는 월맹군 대부대의 최초의 접전과 최대의 희생을 초래한 기념비적 대승입니다|작성자 오해병

푸옥록 전투의 전우들 푸옥록전투 / 해간33기김세창

현충일에 만난 푸옥록30고지 전투의 전우들 푸옥록전투 / 해간33기김세창

청룡 3대대9중대 푸옥록 전투는 월맹군 대부대의 최초의 접전과 최대의 희생을 초래한 기념비적 대승입니다 푸옥록전투 / 해간33기김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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