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ne story
海兵隊의 6.25 動亂 參戰 [1]
(지연작전기)
世界의 赤化를 實現하려는 소련의 흉계에 사주된 北韓政權은 계획적인 南侵을 단행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연출, 야기한 죄상은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엄연한 史實로서 韓民族史에 남게 되었다.
- 내용 -
1. 계획적 남침
2. '장항', '군산', 및 '이리'지구 전투
3. '함양', '진주'지구 전투
4. '진동리'지구 전투
5. '통영'지구 전투
1. 計劃的 南侵
北韓의 共産政權은 智異山과 漢拏山및 五臺山 등지의 무장공비들의 폭동과 선동만으로는 그들의 야욕을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의 주력을 총집결하여 일거에 38선을 넘어 南韓을 강점코져 병력과 장비의 증강에 광분한 끝에 [힘의 우월]을 자인한 나머지 드디어 1950년6월25일 未明을 기하여 議政府, 抱川방면을 主攻으로, 開城, 春川을 助攻으로 하여 북한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동원된 적의 병력은 육군 10개 사단과 2개 여단, 전차 2개 사단, 공군 1개 사단, 해군 및 유격대원 등 총 200,000명과 전차 242대, 항공기 211대로써 침공하여 왔다.
이에 비하여 당시의 한국군은 육군의 8개 사단과 공군, 해군, 및 해병대의 병력을 합하여도 100,000명이 넘지 못하는 열세에 있었으며 장비에 있어서도 적은 중장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나 한국군은 방위를 위하여서도 충분치 못한 경장비였으며 특히 항공기는 무장이 안된 경항공기 L-15, L-14 등 12대와 建國機 10대 계 22대밖에 없었으니 적의 항공기 211대의 10분의 1이었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으로 적은 무력의 우위를 믿고 자신있게 계획적으로 남침하여 왔다.
2. 長項, 群山, 및 裡里지구 전투
(1) 長項, 群山으로 출동
6월 25일을 기하여 38선을 침공한 북한군의 주력은 '서울', '수원' 등지를 경유하여 '금강'을 향하여 살도하여 왔다. 당시 濟州島에서 훈련과 공비토벌에 여념이 없었던 해병대는 이제 처음으로 전선으로 출동하여 본격적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7월 15일 高吉勳 소령이 지휘하는 약 1개 대대가 제주도를 출항하여 전선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이번 動亂에 있어 해병대가 얼마만큼의 공훈을 세울 것인가 하는 試金石이 되는 전투였다.
申鉉俊 사령관의 특별훈시
이때 申鉉俊 사령관은 출동하는 해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간곡한 훈시를 하였다.
1) 대한민국의 새역사를 창건하는 우리 해병대는 민심을 수습하여야 한다.
2) 선발대인 모든 장병들은 해병대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3) 백전백승의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 제1호를 받은 출동부대는 高吉勳 소령 지휘하에 7월 15일 01:00시 해군함정 FS에 승선완료하고 제주항을 출항, 16일 08:00시 군산항에 입항하자 즉시 해양대학교 교사에 본부를 설치하였으며 해병들의 사기는 자못 왕성하였다.
해병대 최초의 작전명령
(2) 長項지구 전투
天安을 점령한 적은 일부 병력을 서해안으로 우회시켰다. 이 적은 대대급정도의 병력을 가진 부대로서 아군과 아무러한 접전도 없이 大川을 경유한 후 群山을 지향하여 7월 17일 09:00시경에는 이미 長項 북방 7km지점까지 침투하였었다.
海兵隊는 이 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제3중대(153중대)를 예비대로 하고 제1중대(151중화기중대) 및 제2중대(152중대)를 공격부대로 하여 17일 12:30시 '장항'북방 4km지점인 50고지 및 42고지까지 진출하여 적에게 대비하였다.
이때 적은 해병대가 빠르게 그곳까지 진출하였을 것으로 예상치 못하고 유유히 남하하여 왔다. 이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기다리고 있던 해병대는 적이 사정내에 이르자 맹열한 집중사격을 가하여 적을 교란시켰다. 예상치 않았던 기습에 당황한 적은 이로 인하여 후퇴할 기세까지 보였으니 그들의 피해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이때의 전과는 후에 元山上陸 시에 압수한 人民軍新聞에 그들의 피해로 사상자만 300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해병대가 소지한 무기는 대부분이 日製인 99식 소총이었고 지원화기로서는 경기관총 3정, 중기관총 2정, 60mm 박격포 3문뿐이어서 그 장비란 적의 우수한 신장비에 비할바 못 되었다. 彈丸 역시 부족하였으며 현대전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유치한 병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處女作戰인 이 전투의 전과는 해병대의 창설이래 피와 땀으로 이룬 맹훈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때 후퇴하였던 적은 얼마 후 부대를 재정비하고 반격하여 왔다. 해병대는 이에 대항하여 7시간 여에 걸쳐 악전고투하였으나 적의 빗발치는 탄환에 맨손으로 대항하는 것 같은 무모한 작전은 할 수 없어 부득기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철수를 완료한 제1중대 및 제2중대는 대대본부와 함께 '군산'까지 철수하였다. 이 전투가 해병대로서는 6.25동란 발발 이후 적, 인민군과의 처녀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전과 및 피해는 다음과 같다.
전과. 사살 40명 사상 250명 포로 4명
피해. 전사 20명 부상 10명 행방불명 1명
(3) 群山, 裡里地區 전투
長項을 점령한 적은 '군산'에 대하여 맹열한 포격을 가해 왔다. 7월 18일 01:00시 해병대는 출동한 총병력을 도원하여 '금강'남단의 방어에 임하고 있었으나 이날 07:00시경 적은 이미 1개 연대(야포대대 포함) 병력으로서 '신성리'에서 '금강'을 도하하여 '성영리'로 침입하고 있었다.
해병대가 '군산'에 도착한 것은 '장항'을 점령한 적의 진출을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저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금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해병대는 제3중대를 '이리'로 전진시키고 제1중대, 제2중대는 '군산', '이리' 간의 철도연변을 따라 '개정리'와 '지경리' 일대를 수색하고 부근일대에 포진하였다.
'금강'을 도하한 적은 일부 병력만 '이리'로 향하고 주력은 '군산' 동북방 10km 지점까지 진출하여 '군산'을 남동북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같은 적정을 판단한 高吉勳 부대장은 7월 19일 05:00시 다음과같은 작전명령을 내렸다.
1. 부대는 재무장하기 위하여 '군산'을 철수하려 함.
2. 金秉鎬 대위는 '이리'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3중대를 지휘하여 '이리'로 향하라.
3. 제1중대는 '고사리'고지에 위치하여 부대본부 및 제2중대
의 철수를 지원하라.
4. 金鐘植 중위는 전투정보대를 지휘하여 '군산'에
잔류하여 정찰에 임하며 적의 진출을 지연케 하라
이리하여 7월 20일 부대는 '군산'비행장에 집결하였고 제1중대는 1개 경기소대를 '고사리'부근 고지에 배치하여 부대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임하게 하고 수색대만을 시내에서 적과 교전함으로써 적의 진출을 지연케 하엿다. 수색대는 이때에 적병 6명을 사살하고 11명을 사상하고 1명을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해병대도 2명의 전사자와 4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계속 [1] ~ [7]까지 있음.
資料: 海兵戰鬪史(海兵隊司令部發行)
oldmarine
출처:海兵隊의 6.25 動亂 參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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