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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유대인이 주식 시스템 이식… 영국을 금융허브로 만들다

Marine Kim 2021. 5. 25. 22:43

네덜란드 유대인이 주식 시스템 이식… 영국을 금융허브로 만들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1.05.25 03:00

1690년 7월 1일 아일랜드 드로그헤다의 보인강을 가로질러 벌어진 결전에서 네덜란드 빌럼 3세의 군대는 영국의 마지막 가톨릭 왕 제임스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의 가톨릭왕 루이 14세와 아일랜드 가톨릭의 지원을 받았지만 징발한 농민 위주였던 보병 부대는 잘 훈련받고 무장한 빌럼 3세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었다. 얀 위크, ‘보인 전투의 윌리엄 3세’, 1690~1695년경, 네덜란드 영국 대사관 소장. /위키피디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가 1573년에 노략질한 약탈물의 가치는 60만파운드에 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가장 큰 수입원은 양털 수출이었는데 1600년 수출액은 100만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렇게 양털 수출과 해적질에 의존하던 후진국 영국이 어떻게 세계를 제패하는 대영제국으로 비상하게 되었을까?

크롬웰의 항해조례, 네덜란드 유대 무역업자들 영국으로 자리를 옮기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뒤 제임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전제정치로 의회와 대립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으로 치달아 1645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이 승리했다. 칼레해전의 승리로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은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국부 증대에 활용해야 했다.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한다. 유럽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 식민지와 무역하려면 반드시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 배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해운과 무역 업계에서 네덜란드를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네덜란드의 유대 무역상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영국 의회 자료실에 보관된 권리장전 두루마기를 펼쳐 보이는 모습. 왕과 왕비의 간섭 없이 의원을 선출할 자유와 의회 내 표현의 자유 등 13항목의 자유를 규정한 내용이 담겼다. /영국 의회 동영상 화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1차 전쟁이 벌어졌다. 3년여 전쟁 끝에 영국이 이겨 네덜란드 해안과 항구를 봉쇄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유대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대표인 랍비 ‘마나세 벤 이스라엘’을 영국에 파견해 1656년 네덜란드 유대 무역상들의 영국 이주를 허가받았다. 1290년 유대인들을 추방한 전력이 있는 영국이 경제 부흥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유대인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해상봉쇄로 어려움을 겪었던 세파르디계 유대인 무역업자들이 먼저 도버해협을 건넜다. 곧 세계 무역 네트워크와 교역 경쟁력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동한 것이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유대인들 빌럼 3세를 돕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영국은 11년 만에 왕정이 복고되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 침공 야욕을 드러냈다. 네덜란드는 인구도 적은 데다가 해군 중심 국가여서 프랑스 육군을 대적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이 도버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를 협공하기로 했다. 1671년 전쟁이 임박하자 사람들은 오라녜(오렌지) 가문의 빌럼 3세를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추대했다. 네덜란드는 육지에서 막강 프랑스군과, 해상에서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 함대와 맞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했다. 당시 오라녜 공 빌럼을 도운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특히 전쟁 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한 것은 세파르디계 유대인 그룹이었다. 빌럼 3세는 그들 대표인 안토니오 모세 마차도와 자코브 페레이라를 조달장관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뼈를 묻는 각오로 빌럼 3세를 도왔다. 왜냐하면 스페인에서 쫓겨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네덜란드마저 패망하면 또다시 정처 없는 방랑길로 내몰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빌럼이 주도하는 ‘전쟁기금 모금기구’에 적극 협력했다. 그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 곧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 망을 통해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였다. 이 자금 덕분에, 네덜란드는 1672~1673년 악전고투 끝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시 침공을 격파해 유럽 전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비 조달 능력, 곧 돈의 힘은 이토록 강했다.

영국은 의회의 요구로 1674년 네덜란드와 휴전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야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빌럼 3세는 1677년 요크 공 제임스 2세의 딸이자 자기의 사촌인 메리와 결혼했다. 네덜란드는 6년간의 전쟁 끝에 프랑스를 물리치고 1678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1689년 빌럼 3세(윌리엄 3세)의 영국 왕위 계승, 유대 금융자본 따라와

그 뒤 영국에서는 자식이 없는 찰스 2세가 서거하자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다. 제임스 2세가 당시 국교인 성공회 대신 가톨릭을 옹호하고 전제정치를 펴자 혁명이 일어났다. 의회는 네덜란드의 빌럼 3세 부부를 영국의 공동 왕으로 추대하여 불러들이는 공작을 진행했다. 그들은 1688년 6월 말 네덜란드의 빌럼 3세 부부에게 영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했다. 빌럼 3세가 영국 왕 찰스 1세의 딸 메리의 아들로 외가 쪽으로 영국 왕실 혈통이었고, 그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다.

 

1688년 런던 화이트홀 궁에서 오라녜 공 빌럼과 메리 스튜어트에게 왕관을 바치는 상·하원 의원들. 화이트홀 궁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말까지 영국 군주의 주된 거주지였다. 에드워드 매슈 워드의 1867년경 그림, 영국 의회 소장. /위키피디아

사실 빌럼 3세도 미리 영국 입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병을 모으는 한편 그는 유대인 은행가 프란시스코 수아소로부터 은화 200만 길더를 빌려 군자금을 확보했다. 군자금 모집 총비용 700만 길더 중 400만 길더는 국채로 발행되어 대부분 유대 금융가들이 사주었다.

그해 11월 빌럼·메리 부부는 1700문의 대포를 탑재한 53척의 군함들과 이를 뒤따르는 수백 척의 선박에 기마병 3000명,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제임스 2세의 입장에서는 네덜란드의 침공이었지만, 빌럼의 입장에서는 제임스 2세의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혁명군이었다. 그러자 영국 귀족과 지방 호족들도 잇달아 빌럼 진영에 가담했다. 사위 부부가 장인을 공격하는 얄궂은 판이었다.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스 강에 버리고 도망쳤지만 다음 날 잡히고 만다. 빌럼은 사형될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제임스 2세를 풀어주어 프랑스로 건너가게 했다.

1688년의 사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이듬해 2월, 빌럼(윌리엄) 부부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승인한 다음 공동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무장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인 가운데 반 정도가 유대 금융인들로 세파르디 유대인 3000명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5000명 등 8000여 명이 이때 영국으로 옮겨갔다. 맨 앞에서 이 유대 금융인들을 이끌었던 페레이라의 아들 이삭은 영국의 병참장관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빌럼 3세 공작이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되어 양국을 동시에 통치하게 되자 그의 경제관과 금융에 대한 시각을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 유대인과 금융자본이 속속 영국으로 건너갔다. 마차도와 메디나 같은 유대 금융인들은 1689년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네덜란드식 주식시장을 런던에 도입했다. 이처럼 유대인 금융업자들이 네덜란드를 부흥시켰던 사업 방식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유대인들의 선진 기법이 영국의 금융·세제·행정 전체를 개혁했다. 윌리엄 3세는 유대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네덜란드식 국채 발행제도 도입과 더불어 영국 동인도회사를 개혁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경험을 살려 재무부와 상무부 조직도 만들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 체계와 금융산업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참고; <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비아북)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해상국가와 국제금융의 바통 넘겨받아]

명예혁명 이전 영국은 오랫동안 종교 간, 민족 간 전쟁터였다. 그들은 서로 보복하는 유혈 참사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권리장전의 내용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열거한 뒤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 제정이나 세금 징수를 금지하며 의회를 자주 소집할 것과 국민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을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또 유대교와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해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토대로 영국은 세계의 패권 국가로 비상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해상 국가로서의 지위와 국제 금융 중심지의 바통을 영국에 넘겼다. 이에 따라 저리로 대규모 금융 지원을 받은 영국 제조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무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도 속도를 냈다. 그 뒤 영국은 세계 교역과 식민 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네덜란드의 전성기와 유대인들의 네덜란드 체류 기간이 무섭도록 일치한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