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순례의 길

개통식을 앞둔 순례길 ‘한티가는 길’ 45.6㎞

Marine Kim 2016. 9. 8. 21:58

10일 개통식을 앞둔 순례길 ‘한티가는 길’ 45.6㎞

박해를 피해 밤새 걸었던 길 위에서... 스스로를 비우고 채운다


누구 앞에나 길은 놓여있다. 미래를 향해 걸어야만 할 길에서도 감사하며 맞는 기쁨의 길, 피하고만 싶은 시련의 길…. 여러 길이 놓여있다. 어느 길을 걸을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수백 년 전, 하느님만 믿고 따르며 걸었던 선조들의 길은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 길 위에서 지치면 잠시 숨 고르고 또 걸어간다. 순교자성월, 걸어보자. 오롯한 믿음의 길을 따라서. 9월 순교자성월 맞아 신앙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걸었던 길 한 곳을 소개한다. ‘한티가는 길’. 칠곡군이 국비를 들여 만든 왜관 가실성당에서 칠곡 동명 한티순교성지까지 45.6㎞ 이어지는 순례길이다. 9월 10일 개통식을 앞두고 있는 한티가는 길을 미리 다녀왔다.


■ 37기 순교자 무덤을 따라

팔공산 자락에 있는 한티성지. 한티가는 길 마지막 4㎞ 가까이는 성지 뒷산을 걷는 오솔길이다.

성지 뒤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었다. 마른 솔잎 쌓인 흙길은 부드러웠다. 울창한 나무들은 35℃ 넘는 여름날 뙤약볕 아래 시원한 그늘이 되어줬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마주하는 무덤. 십자가 묘비에는 1, 2, 3…. 번호가 새겨져있었다. 모두 37기. 한티성지에서 발견된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돌더미 속에도 비탈진 응달에도 산골 곳곳에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서 짧은 기도를 하며 계속 산길을 걸었다.

200년 전 박해를 피해 숨어든 깊은 산골 한티마을. 오솔길을 걷다보니 도자기 조각들이 밟혔다. 사기골, 큰골, 숯골과 같은 지명처럼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던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교우촌은 사라졌지만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의 영성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여기 생(生)과 사(死)를 한가지로 염원한 순교자의 삶과 죽음이 불사불멸의 영혼으로 살아있나니, 후대(後代)여, 이 혼돈의 시대에도 다시금 영생(永生)의 삶을 생각하라.”

오솔길을 다 내려오니 바위에 새겨진 이정우 신부의 글이 들어왔다.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이 땅에서 오늘날의 순교에 대해서 묵상했다.

순교자 무덤을 따르는 순례길은 3개의 코스로 나눠지는데, 겸손의 길, 인내의 길, 십자가의 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2014년 8월, 여영환(오또) 신부가 한티피정의 집 관장으로 부임해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도록 둘레길을 새로 단장했다. 가파른 길은 둘러 올라가게 길을 냈고, 산책하듯 기도하며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처음 한티가는 길 계획은 성지 입구에서 끝이 났다. 여 신부의 제안으로 성지 오솔길을 포함해 총 45.6㎞로 완성됐다.

“칠곡군에서 한티가는 길을 만든다고 할 때 기뻤습니다. 종착지인 ‘한티’ 지명을 따랐지만 이 길의 마지막은 성지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마치는 것처럼 한티가는 길도 순교자 무덤을 따라 걸으며 끝을 맺게 되는 것이죠.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종교를 떠나 모두가 걸을 수 있는 길이 됐으면 합니다.”


■ 5개 구간 45.6㎞의 한티가는 길

한티가는 길은 경북 칠곡군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조성됐다. 2014년 5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이달 10일 개통식을 갖는다.

왜관 가실성당에서 한티순교성지까지 모두 5개 구간으로 나눠 구성됐다. ▲ 1구간 가실성당~신나무골성지(10.5㎞) ▲ 2구간 신나무골성지~창평지(9.5㎞) ▲ 3구간 창평지~동명성당(9.0㎞) ▲ 4구간 동명성당~가산산성 진남문(8.5㎞) ▲ 5구간 진남문~한티성지(8.1㎞)이다.

구간별로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길은 시작과 끝이 정해진 원웨이(one-way)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온다면 왜관역에 내려서 가실성당에서 출발해서 이틀간 걸어야 하는 일정이다.

여 신부는 풀코스를 끝까지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꼬박 20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고행길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인생길, 신앙을 뜨겁게 하는 순례길이 될 수도 있겠죠. 우리 선조들이 밤새 걸었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께로 오롯이 향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길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면 지루해지는 법. 한티가는 길은 45.6㎞ 구간에 숲길, 임도, 마을길이 고루 이어져 다른 느낌으로 걸을 수 있다.




■ 마지막은 한티피정의 집에서

여유가 있다면 이틀간 걷고, 한티성지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내도 좋을 듯하다. 19곳 스탬프를 찍으면 한티피정의 집 숙박비를 50% 할인해준다.

피정의 집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된다. 영성관에는 가족, 단체가 머무를 수 있는 콘도형 시설도 마련돼 있다. 하루 전 미리 신청하면 미사 후 점심(6000원)도 먹을 수 있다.

또 ‘외딴 곳에서 좀 쉬자’를 주제로 힐링피정도 마련된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자연 속에서 잠시 숨 고르기 할 수 있는 시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관장 여영환 신부가 지도를 맡는다.

※ 순례 및 피정 문의 054-975-5151


- 왜관 가실성당에서 칠곡 동명 한티순교성지까지 이어지는 ‘한티가는 길’이 9월 10일 개통식을 갖는다. 3구간 여부재 일대에서 드론으로 항공촬영한 풍경.



- 한티성지 순례길에 있는 37기 무덤.



- 성지 안 대형 십자가.



- 관장 여영환 신부가 한티마을 사람을 상징한 돌 앞에 서 있다.




- 한티가는 길을 알리는 리본.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박경희 기자, 사진 박원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