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순례의 길

대구대교구 > 신나무골

Marine Kim 2015. 10. 19. 18:29

대구 교회 첫 본당터 전경. 가운데 사제관, 오른쪽에 명상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4번 국도 상에 위치한 신동 초등학교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 3.3km 정도 가면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 완정 · 왜관의 가실 ·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교우촌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20km 가량 떨어진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서 필수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 읍내에서 하루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매우 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모바일용 요약 설명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 다블뤼 · 최양업 ·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박해가 잦아들면서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시작했습니다. 1896년 한불조약 이후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고,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습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습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던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 그리고 세 아이는 포졸들을 피해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포졸들에게 붙잡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이선이와 장남 배 스테파노는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배교하고 풀려났던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신만 이장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1977년 제1차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소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복원했으며 마당에 로베르 신부 흉상도 건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