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섬김받지 않고 섬기러 왔다' 誓願처럼… 가난한 환자는 하느님 선물"
- 입력 : 2016.12.05 03:00
['아산상 大賞' 받은 '貧者의 무료 병원'… 요셉의원 이문주 원장 신부]
"한 번도 수염 자른 적 없지만 저절로 빠지고 끊어지면서
세월이 흐르자 검은색 수염 허옇게 바뀌었어요"
"우린 돈 버는 사람 아니니 후원자 돈을 잘 써야죠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믿음 잃어서는 안 되지요"
현대식 영등포역사에서 나와 왼쪽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1970년대식 흑백(黑白) 풍경이 펼쳐진다. 쪽방촌 주민과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쭈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으며 잡담하거나 낮술에 이미 취해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있다. 악취도 좀 날 수 있다. 초행자는 발을 들여놓았다가 '어이쿠 잘못 들어왔다'며 금방 되돌아나갈 골목이었다.
그 골목 속에 있는 4층 건물인 '요셉의원'이 얼마 전 '아산상' 대상(大賞)을 받았다. 빈자(貧者)들을 위한 무료 병원으로 운영돼온 곳이다.
그 골목 속에 있는 4층 건물인 '요셉의원'이 얼마 전 '아산상' 대상(大賞)을 받았다. 빈자(貧者)들을 위한 무료 병원으로 운영돼온 곳이다.
신문 광고에 실린 수상 기념사진을 보면, 긴 수염을 기르고 있는 이문주(79) 원장 신부를 비롯해 요셉의원 구성원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이런 조직이 흥미로웠다.
작은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내 데스크에도 점퍼 차림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사진에서 본 긴 수염의 이문주 원장신부가 좁은 계단으로 내려왔다. 여든 살 노인에게 보기 드문 맑은 눈이었다.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을 많이 닮았군요.
"베트남어(語) 성서 보급 관계로 베트남에 자주 가는데 나를 보면 '호 아저씨(호찌민의 애칭)'라고 불러요(웃음). 사실 월남전 당시 백마부대의 군종(軍宗) 신부로 1년간 파견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수염을 기르게 된 것이군요.
"그건 아니고, 1976년 필리핀 오지로 연수 교육을 갔을 때 자연적인 삶과 평화(平和)에 대한 각성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얼굴에 칼을 안 댄 게 현재 수염의 시작이지요. 그 뒤로 수염을 한 번도 자른 적이 없지만 저절로 빠지고 끊어지면서, 세월이 흐르자 검은색 수염은 허옇게 바뀌었어요. 물론 매일 수염에 올리브유를 발라줘요."
―1976년이면 그때는 젊었을 텐데요.
"서른아홉 살이었으니,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수염을 기르면 온갖 뒷공론을 이겨낼 인내가 필요했어요. 내 수염을 보고 무섭다고 우는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호기심 때문에 내게 살살 다가오는 아이가 더 많아요. 수염을 한번 당겨보려는 거죠(웃음)."
그는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던 고(故) 선우경식 원장의 후임이다. 원장실에는 선우 원장의 의사 가운과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선우 원장님은 말년에 자신이 위암에 걸렸는데도 진료를 계속해 왔지요. 2008년 4월쯤 그분으로부터 '병자(病者) 성사를 받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서울 길음동 자택을 찾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생선회와 자신이 좋아하는 곱창·만두로 저녁 준비를 해놓았더군요. 당초 제가 요셉의원의 지도신부를 맡은 건 '나는 빵을 나눠줄 테니 신부님은 주님의 말씀을 나눠주십시오'라는 부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날은 그분이 '신부님, 빵과 말씀은 하나이지 않습니까. 병원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열흘 뒤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병원 운영을 해보지 않은 성직자에게 왜 부탁했을까요?
"이미 다른 의사분들에게 제의했지만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선우 원장님은 돌아가실 때 봉급이 20만원이었습니다. 다른 직원들과 똑같았어요."
―부양가족이 있으면 완전한 봉사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제게 맡겼는지 모르죠. 선우 원장님은 결혼을 안 했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어요. 그분은 사제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수도자는 아닌데 수도자적 삶을 사는 '재속회(在俗會)' 회원이었어요. 그런 영성(靈性)이 있었기에 요셉의원을 끌고 왔겠지요. 재미있는 건 그분은 사제를 꿈꿨지만, 반대로 저는 고교 시절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의사가 될 일이지, 왜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까?
"4대째 가톨릭 집안이었어요. 유아 세례를 받았으니 이 길만 알았던 거죠. 그러다가 대학 진로를 앞두고 고민했어요. 신부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결국 신학교를 갔어요."
―사제가 되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봤습니까?
"제가 사제 서품을 받은 1962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당시 논의의 큰 주제가 '봉사하는 교회'였어요.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서원(誓願)하는 성구(聖句)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복음 20장 28절)'로 정했습니다. 그 서원이 오늘까지 이어졌어요."
―성직자라도 인간의 욕망이 있는 건데, 평생 그대로 가기가 쉽지는 않지요?
"끊임없이 자기 채찍질을 해야지요. 묵상과 기도를 하고 성서도 읽어야지요. 그래도 사람 힘만으로 안 되지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은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내 데스크에도 점퍼 차림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사진에서 본 긴 수염의 이문주 원장신부가 좁은 계단으로 내려왔다. 여든 살 노인에게 보기 드문 맑은 눈이었다.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을 많이 닮았군요.
"베트남어(語) 성서 보급 관계로 베트남에 자주 가는데 나를 보면 '호 아저씨(호찌민의 애칭)'라고 불러요(웃음). 사실 월남전 당시 백마부대의 군종(軍宗) 신부로 1년간 파견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수염을 기르게 된 것이군요.
"그건 아니고, 1976년 필리핀 오지로 연수 교육을 갔을 때 자연적인 삶과 평화(平和)에 대한 각성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얼굴에 칼을 안 댄 게 현재 수염의 시작이지요. 그 뒤로 수염을 한 번도 자른 적이 없지만 저절로 빠지고 끊어지면서, 세월이 흐르자 검은색 수염은 허옇게 바뀌었어요. 물론 매일 수염에 올리브유를 발라줘요."
―1976년이면 그때는 젊었을 텐데요.
"서른아홉 살이었으니,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수염을 기르면 온갖 뒷공론을 이겨낼 인내가 필요했어요. 내 수염을 보고 무섭다고 우는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호기심 때문에 내게 살살 다가오는 아이가 더 많아요. 수염을 한번 당겨보려는 거죠(웃음)."
그는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던 고(故) 선우경식 원장의 후임이다. 원장실에는 선우 원장의 의사 가운과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선우 원장님은 말년에 자신이 위암에 걸렸는데도 진료를 계속해 왔지요. 2008년 4월쯤 그분으로부터 '병자(病者) 성사를 받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서울 길음동 자택을 찾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생선회와 자신이 좋아하는 곱창·만두로 저녁 준비를 해놓았더군요. 당초 제가 요셉의원의 지도신부를 맡은 건 '나는 빵을 나눠줄 테니 신부님은 주님의 말씀을 나눠주십시오'라는 부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날은 그분이 '신부님, 빵과 말씀은 하나이지 않습니까. 병원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열흘 뒤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병원 운영을 해보지 않은 성직자에게 왜 부탁했을까요?
"이미 다른 의사분들에게 제의했지만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선우 원장님은 돌아가실 때 봉급이 20만원이었습니다. 다른 직원들과 똑같았어요."
―부양가족이 있으면 완전한 봉사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제게 맡겼는지 모르죠. 선우 원장님은 결혼을 안 했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어요. 그분은 사제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수도자는 아닌데 수도자적 삶을 사는 '재속회(在俗會)' 회원이었어요. 그런 영성(靈性)이 있었기에 요셉의원을 끌고 왔겠지요. 재미있는 건 그분은 사제를 꿈꿨지만, 반대로 저는 고교 시절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의사가 될 일이지, 왜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까?
"4대째 가톨릭 집안이었어요. 유아 세례를 받았으니 이 길만 알았던 거죠. 그러다가 대학 진로를 앞두고 고민했어요. 신부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결국 신학교를 갔어요."
―사제가 되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봤습니까?
"제가 사제 서품을 받은 1962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당시 논의의 큰 주제가 '봉사하는 교회'였어요.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서원(誓願)하는 성구(聖句)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복음 20장 28절)'로 정했습니다. 그 서원이 오늘까지 이어졌어요."
―성직자라도 인간의 욕망이 있는 건데, 평생 그대로 가기가 쉽지는 않지요?
"끊임없이 자기 채찍질을 해야지요. 묵상과 기도를 하고 성서도 읽어야지요. 그래도 사람 힘만으로 안 되지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당 신부보다 특수 사목(司牧)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1972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제게 '독일에 가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오라'고 했어요. 3년간 독일 유학을 하고, 마지막 1년은 영국에서 연수했어요. 귀국할 즈음 추기경께 '서울 교구에서 가장 취약한 곳으로 저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왜 그런 편지를?
"독일에서 배운 공부로 가장 가난한 곳에서 사목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귀국해서 서울 시흥동 본당에 발령 났어요.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울에 진입 못 하거나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추기경께서 '성당이 가건물이니 가서 제대로 짓게'라고 했습니다. 제가 '시흥을 한번 돌아봤더니 성당 짓는 것보다 먹는 게 더 급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맹랑했지요."
―선우경식 원장은 처음 어떻게 만난 겁니까?
"1979년 제가 강남 성모병원 원목(院牧) 신부로 있을 때였지요. 이분이 미국에서 전문의를 따서 돌아온 뒤 '나는 앞으로 무료 병원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주위에서는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왜 저러는가. 꿈같은 얘기다'라고 반응했지요. 그런데 저만은 '우리 사회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맞장구를 치니 대화 상대가 된 거죠. 답답하면 저를 찾아왔어요."
―바람을 잡았군요. 두 분 중 누가 연상입니까?
"제가 여덟 살 위였어요. 이분은 서울 신림동 철거민 동네에서 의대생들과 함께 의료 봉사를 하다가 1987년 개원했어요. 그때 제게 지도신부를 맡아달라고 했어요."
―병원 건립과 운영비, 인건비, 의료 장비, 약품 등이 다 돈인데, 처음부터 무료였습니까?
"병원 설립에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운영은 처음부터 봉사자와 후원자들로만 꾸려갔어요. 이분은 '가난한 환자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이라며 고생을 감수해왔던 거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요셉의원의 정신입니다. 신림동이 재개발되면서 1997년 영등포로 옮겨왔어요. 원래 다른 용도의 건물을 병원용으로 쓰기 위해 넉 달 이상 공사를 했어요."
요셉의원의 복도와 계단은 손걸레로 닦았는지 반들반들했다. 그는 진료실마다 돌며 직원 및 봉사자들을 나에게 인사시켰고, 의료 장비를 소개하면서 다른 종합병원에 비하면 별거 아닐 듯한데도 '이건 고가 장비'라고 자랑했다. 어떤 진료실에는 빵을 싼 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진료받는 환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의료진 봉사로 이뤄지는 요셉의원은 오후 1~5시, 저녁 7~9시에 진료한다. 은퇴한 의사들이 주축이었고, 현역 의사들은 자신의 근무 병원에서 퇴근한 뒤 저녁에 온다고 했다. 이날 오후에 만난 봉사자들은 전직 대학 병원 의사, 전직 개인 병원 원장, 전직 고교 교감, 전직 약사 등 모두 '역전의 용사'였다. '아산상(賞)' 수상 기념사진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노인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요셉의원 설립 때부터 방사선 기사로 무료 봉사해온 최동식씨는 작년에 팔순 잔치 비용으로 쓸 돈 1000만원을 오히려 기부했다고 한다.
"영등포로 옮겨올 당시 봉사 연인원 600명이 지금은 2200명에 달합니다. 의료만이 아닌 식당 봉사, 이발, 청소,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합니다. 선우 원장님은 생전에 '후원자가 3000명이 넘어 지로 용지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후원자 수도 이제 8000명이 됐습니다."
―신부님이 병원을 맡아서 성적이 더 좋아진 거군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은 선우 원장님이 뿌려놓은 '밀알'이지요. 그분은 카리스마가 있었고 혼자 결정을 잘 내렸어요. 저는 그러지 못해요. 의료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가톨릭대 병원에 계시던 신완식 의무원장님을 모셔왔지요."
―신부님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한때는 원칙주의자, 대쪽같이 꼿꼿한 신부라고들 했지요. 하지만 이런 점이 자칫 남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거지요."
―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한번은 여기 계신 여성분과 KTX를 타고 지방을 간 일이 있는데 그분이 특실 표를 샀어요. 도착하고 나서야 알고서 '우리는 후원자들 돈으로 공적인 출장을 왔다. 나는 올라갈 때 일반실을 타겠으니 당신은 마음대로 해라. 단 특실료 추가 돈은 따로 내라'고 했어요. 아마 그분은 '뭐 저런 게 있어'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마음에 걸렸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지요. 후원자 돈을 잘 써야지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제가 후원자들에게 감사 전화를 걸면 꼭 듣는 소리가 '잘 써주십시오'라는 것이니까요."
―병원 운영을 해보니 무엇이 가장 어려웠습니까?
"요셉의원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었지요. 상근 직원 지원자를 면접하면 '봉사하고 싶어 지원했다'고 대답하지만, 마지막에는 꼭 '봉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봐요. 여기 직원 봉급은 거의 최저생계비 수준인 한 달 150만원 선입니다. 물질적 결핍에도 이런 소임을 감당하도록 영적·정신적으로 불어넣어 주는 일이 어려워요."
―원장님 봉급은 얼마입니까?
"봉사를 말하는 제가 월급을 받으면 되나요. 의무원장님도 안 받습니다."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죠(웃음). 사실은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생활비를 줘요. 사제 정년퇴임이 70세인데 저는 혜택을 받은 셈이지요. 은퇴 사제를 위한 숙소에서 지내며 병원까지 전철로 다니지요."
―상금이 3억원 되는 큰 상도 받았고,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면 다른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까?
"저도 언젠가 변심할지 몰라요(웃음).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지요. 사람들의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1972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제게 '독일에 가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오라'고 했어요. 3년간 독일 유학을 하고, 마지막 1년은 영국에서 연수했어요. 귀국할 즈음 추기경께 '서울 교구에서 가장 취약한 곳으로 저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왜 그런 편지를?
"독일에서 배운 공부로 가장 가난한 곳에서 사목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귀국해서 서울 시흥동 본당에 발령 났어요.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울에 진입 못 하거나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추기경께서 '성당이 가건물이니 가서 제대로 짓게'라고 했습니다. 제가 '시흥을 한번 돌아봤더니 성당 짓는 것보다 먹는 게 더 급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맹랑했지요."
―선우경식 원장은 처음 어떻게 만난 겁니까?
"1979년 제가 강남 성모병원 원목(院牧) 신부로 있을 때였지요. 이분이 미국에서 전문의를 따서 돌아온 뒤 '나는 앞으로 무료 병원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주위에서는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왜 저러는가. 꿈같은 얘기다'라고 반응했지요. 그런데 저만은 '우리 사회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맞장구를 치니 대화 상대가 된 거죠. 답답하면 저를 찾아왔어요."
―바람을 잡았군요. 두 분 중 누가 연상입니까?
"제가 여덟 살 위였어요. 이분은 서울 신림동 철거민 동네에서 의대생들과 함께 의료 봉사를 하다가 1987년 개원했어요. 그때 제게 지도신부를 맡아달라고 했어요."
―병원 건립과 운영비, 인건비, 의료 장비, 약품 등이 다 돈인데, 처음부터 무료였습니까?
"병원 설립에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운영은 처음부터 봉사자와 후원자들로만 꾸려갔어요. 이분은 '가난한 환자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이라며 고생을 감수해왔던 거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요셉의원의 정신입니다. 신림동이 재개발되면서 1997년 영등포로 옮겨왔어요. 원래 다른 용도의 건물을 병원용으로 쓰기 위해 넉 달 이상 공사를 했어요."
요셉의원의 복도와 계단은 손걸레로 닦았는지 반들반들했다. 그는 진료실마다 돌며 직원 및 봉사자들을 나에게 인사시켰고, 의료 장비를 소개하면서 다른 종합병원에 비하면 별거 아닐 듯한데도 '이건 고가 장비'라고 자랑했다. 어떤 진료실에는 빵을 싼 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진료받는 환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의료진 봉사로 이뤄지는 요셉의원은 오후 1~5시, 저녁 7~9시에 진료한다. 은퇴한 의사들이 주축이었고, 현역 의사들은 자신의 근무 병원에서 퇴근한 뒤 저녁에 온다고 했다. 이날 오후에 만난 봉사자들은 전직 대학 병원 의사, 전직 개인 병원 원장, 전직 고교 교감, 전직 약사 등 모두 '역전의 용사'였다. '아산상(賞)' 수상 기념사진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노인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요셉의원 설립 때부터 방사선 기사로 무료 봉사해온 최동식씨는 작년에 팔순 잔치 비용으로 쓸 돈 1000만원을 오히려 기부했다고 한다.
"영등포로 옮겨올 당시 봉사 연인원 600명이 지금은 2200명에 달합니다. 의료만이 아닌 식당 봉사, 이발, 청소,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합니다. 선우 원장님은 생전에 '후원자가 3000명이 넘어 지로 용지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후원자 수도 이제 8000명이 됐습니다."
―신부님이 병원을 맡아서 성적이 더 좋아진 거군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은 선우 원장님이 뿌려놓은 '밀알'이지요. 그분은 카리스마가 있었고 혼자 결정을 잘 내렸어요. 저는 그러지 못해요. 의료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가톨릭대 병원에 계시던 신완식 의무원장님을 모셔왔지요."
―신부님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한때는 원칙주의자, 대쪽같이 꼿꼿한 신부라고들 했지요. 하지만 이런 점이 자칫 남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거지요."
―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한번은 여기 계신 여성분과 KTX를 타고 지방을 간 일이 있는데 그분이 특실 표를 샀어요. 도착하고 나서야 알고서 '우리는 후원자들 돈으로 공적인 출장을 왔다. 나는 올라갈 때 일반실을 타겠으니 당신은 마음대로 해라. 단 특실료 추가 돈은 따로 내라'고 했어요. 아마 그분은 '뭐 저런 게 있어'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마음에 걸렸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지요. 후원자 돈을 잘 써야지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제가 후원자들에게 감사 전화를 걸면 꼭 듣는 소리가 '잘 써주십시오'라는 것이니까요."
―병원 운영을 해보니 무엇이 가장 어려웠습니까?
"요셉의원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었지요. 상근 직원 지원자를 면접하면 '봉사하고 싶어 지원했다'고 대답하지만, 마지막에는 꼭 '봉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봐요. 여기 직원 봉급은 거의 최저생계비 수준인 한 달 150만원 선입니다. 물질적 결핍에도 이런 소임을 감당하도록 영적·정신적으로 불어넣어 주는 일이 어려워요."
―원장님 봉급은 얼마입니까?
"봉사를 말하는 제가 월급을 받으면 되나요. 의무원장님도 안 받습니다."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죠(웃음). 사실은
―상금이 3억원 되는 큰 상도 받았고,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면 다른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까?
"저도 언젠가 변심할지 몰라요(웃음).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지요. 사람들의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4/20161204015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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