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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반성의 현장, 아우슈비츠

Marine Kim 2017. 1. 26. 20:14

아픔과 반성의 현장, 아우슈비츠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세계 곳곳의 의미 있는 현장의 이야기를 풀어보는 '특별한 흔적들'은 아픔과 반성의 땅 '아우슈비츠'로 시작한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7.01.25 08:31 | 수정 : 2017.01.25 08:56

독일어로 아우슈비츠(Auschwitz)로도 불리는 오시비엥침(Oświęcim)은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키(Małopolskie)주에 위치한 도시다. 독일어 이름인 아우슈비츠(Auschwitz)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도시의 인구는 약 45,000명이며, 크라쿠프(Krakow)에서 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 이하, 수용소 지칭과 구분을 위해, 도시명을 말할 때는 오시비엥침이라 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조선 DB

오시비엥침(폴란드 명)은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했다. 폴란드 분할시대인 1772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18년 폴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39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독일이 도시명을 오시비엥침에서 아우슈비츠로 고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시비엥침에는 강제 수용소의 대표격으로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가 있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의 대거 학살을 그 목적으로 하는 '최종적 해결'이라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세운 여섯 군데의 대표 수용소 중 그 본부 격이며,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원래는 1940년 나치 독일 점령군에 의해 처음에는 폴란드인, 이후에는 소련군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곧 여러 다른 민족들을 모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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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나치가 강제노역을 미화한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이 글귀를 제작했던 유태인들은 'B'글자를 왜곡된 형태로 만듦으로써 저항심을 몰래 담았다. /조선 DB, 블룸버그

이곳은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본격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아우슈비츠 1'이라는 이름의 최초 수용소는 본래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가두기 위한 곳이었으나,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2'(비르케나우)는 중심적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8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3'(모노비츠)은 특수 노동 수용소로, 유대인들이 이게 파르벤(IG Farben) 합성 고무 공장과 석유 추출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다.

* 폴란드 등 나치의 점령지 전역에 크고 작은 강제 수용소들이 수십 개 세워졌고, 이후 6개의 대수용소로 통합되었다.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체계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수감자들이 늘어나고 계속 지어나가, 나중에는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1),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2), 모노비츠(아우슈비츠3)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대량 학살'의 시대
나치는 히틀러(Adolf Hitler)의 과격한 반(反)유대주의를 고취하여 1933년의 정권획득 후 유대인 박해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자, 점령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살해하고 게토나 강제 수용소에 격리하여 열악한 환경하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1941년 이후 수용소에서의 가스 살해나 이동 말살대에 의한 총살 등으로 유대인 말살작전을 전개했다. 이때의 사망자 수는 60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수용소에서 학살된 사람의 90%가 유대인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된 살해 도구로 사용된 것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으나, 과도한 노동, 굶주림, 구타, 이유 없이 행해지던 사격, 생체실험 등으로 인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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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아 기념관 (Mémorial de la Shoah)


사죄… 사죄… 또 사죄
반성에 앞장서는 리더

독일이 선진국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끊임없는 사죄가 함께 했다. 리하르트 슈뢰더 훔볼트대 교수는 "독일은 끊임없는 과거사 반성을 통해 이웃과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며 "독일이 전후 70년 만에 유럽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의 리더들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메르켈 독일 총리도 재임 기간동안 끊임없는 반성과 사과를 통해 과거사 업보를 털어내고 있다. 이스라엘과 나치 강제 수용소까지 찾아가 '과거사 반성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고, 이런 모습은 국민은 물론 세계인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전범국 출신의 총리인 그는 유럽의 리더를 넘어 세계의 리더가 됐다.

적극적인 처벌과 성숙한 용서

지금까지 독일은 나치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따로 없고, 예외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2015년 9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처형을 도운 혐의로 90대 노인이 '71년 만에' 독일 검찰에 기소됐고, 앞서 그해 7월에 독일 법원은 나치 정권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했던 오스카 그뢰닝(당시 94세)에게 학살 방조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뢰닝은 당시, 평결을 앞두고 마지막 진술을 통해 "아우슈비츠는 어느 누구도 협력해야 할 곳이 아니었다"며 "그 사실을 좀 더 일찍이 깨달아 단호하게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뉘우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고 결과가 나오자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70명의 공동 원고 중의 한 명이었던 에바 모제스 코르(당시 81세)는 자신의 페이스북 등을 통해 "독일 법원의 이 같은 판단에 실망했다"며 그뢰닝을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앞서 코르는 재판 도중 "나는 그를 진심으로 용서한다"며 그뢰닝과 진심어린 포옹과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나치에 600만 희생 폴란드…
진정한 반성에 마음 열어

폴란드는 이웃 강대국 독일에 1000년 가까이 시달린 민족이다. 120여 년간 나라를 빼앗겼고, 2차대전 중 600만 명 이상이 나치에 학살당했다. 하지만 독일의 끝없는 반성은 피해국 폴란드의 마음을 열고 있다.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에서 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2차대전 발발 75주년' 기념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문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25년 전 콜 총리의 '화해의 미사'에 대한 헌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화해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며 "미래 세대와 유럽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맺었다.

폴란드·독일 두 나라의 현대사는 반성이 상대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1965년 폴란드 천주교계는 '천주교 폴란드 전래 10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며 서독 종교인에게 초대 서한을 보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 독일 나치의 만행을 용서할 테니 폴란드가 2차대전 후 독일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피해국이 가해국에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이 서한은 서독의 여론을 움직였고 1969년 서독 총리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이스라엘-독일 두 나라 대사
"과거사 극복은 기적적인 일"

우리 구트만 주한(駐韓) 이스라엘 대사는 2015년 6월 4일, 서울 용산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독일·이스라엘 수교 50년 기념식 연설에서 "나치 독일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50년 전 두 나라의 역사는 어두웠지만, 50년간 화해했고, 이제 이 화해의 빛으로 미래를 밝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 대사는 기념 연설에서 "양국의 과거사 극복은 기적적인 일"이라며 "종종 많은 사람이 우리 관계를 별것 아닌 것처럼 보는데, 1965년 이전 상황을 보면 지금처럼 우호국이 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기적의 시작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결단에서 시작됐다"면서 "수교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와 레비 에쉬콜 이스라엘 총리, 그리고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가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인 독일의 반성과 피해자인 이스라엘의 용서가 요원해 보이던 화해를 이뤘다"면서 "이건 정말 기적"이라고 했다.

독일이 사죄하게 만든 힘, 여기서 나왔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추모 단지 '야드 바솀'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로 붐빈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전시실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사료관과 홀로코스트 연구 국제학교 건물에는 자료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사료관 안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이 학살한 유대인 명부를 비롯,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대인의 일기장 등 1억 2,500만 건의 문서와 10만 건의 영상 자료가 보관돼 있다.

홀로코스트 연구 국제학교에는 세계 각국에서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러 온 연구자로 가득하고, 각국의 국제학교 교사들을 초빙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을 해주는 과정도 있다. 이 교사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게 된다. 야드 바솀은 추모관이자 역사 연구소 겸 학교다.
역사의 진실은 거저 드러나지 않는다
야드 바솀의 리탈 비르 자료·정보국장은 "'전 세계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독일 총리는 매년 사죄까지 하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왜 그렇게 자료 수집과 분석 그리고 홍보를 계속하느냐'고 많은 이가 의아해한다"며 "역사는 끊임없이 입증하고 알리지 않으면 증발해 사라진다"고 했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

매년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이다. 1945년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유대인들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날로, 2005년에 유엔(UN·국제연합)에서 지정했다. 유대인 대학살 국제 추모의 날이라고도 불린다. (이스라엘에서는 1월 16일, 유엔 및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1월 27일로 지정하고 있다.)
▶ [시론] 홀로코스트는 추모일 선포까지 60년 걸렸다
▶ [깨알지식] 홀로코스트 추모일, 이스라엘과 유엔이 서로 다른 까닭은

홀로코스트(Holocaust)

'완전히 타버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holokauston'에서 나온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 혹은 '번제물(燔祭物)'이란 뜻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엄청난 대재앙' 혹은 '파괴', '대학살'이란 의미로 쓰인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쓴다.

* 번제(燔祭): 과거 유대인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을 불로 태웠던 방식

제노사이드(genocide)

홀로코스트와 거의 비슷한 뜻이나,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하는 행위로, 보통 종교나 인종ㆍ이념 등의 대립으로 발생한다.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집단학살'을 뜻한다. 1944년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이 국제법에서 집단 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홀로코스트 혹은, 제노사이드 문제가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유대인(Jew)

BC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보통 히브리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왕국이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리고,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양하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전체 수상자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 천재인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의 세계 분산을 가리킨다. 오늘날 이 개념은 유대인들과 같이, 어떤 특정 장소를 준거로 결집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강한 정서적·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현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윗의 별(star of David, magen David)

'다윗 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Magen David'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를 상징하는 표식이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과 유대를 통합한 후 다윗의 별을 유대 왕의 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때문에 다윗의 별은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에 그려져 있다. 나치는 유대인을 감금하고, 노란색 다윗의 별을 달도록 해 사회에서도 격리했다. 안네 프랑크는 안네의 일기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엾게 보았지만, 노란색 별을 단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했다"라고 썼다.

 

나치스(Nazis)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1945년 정권을 장악한 독일의 파시즘 정당으로, 정식 명칭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다. 흔히 나치(Nazi) 또는 나치스(Nazis·나치의 복수형)로 불린다. 나치스는 정식 당 명칭이 아니라 히틀러 반대세력이 얕잡아 부른 비칭(卑稱)이다.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 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중심이론은 독일 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 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환경을 부패시키려 하므로, 우수한 민족은 그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하거나, 멸종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나치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는 학창시절에 인종이론이나 반유대주의 등을 공부하며 정치사상을 형성했다. 독일 민족지상주의자가 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았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반(反)유대주의적인 군소 정당에 가입했는데 이는 나치스(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신이다. 그는 탁월한 웅변능력을 통한 선전활동으로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정치활동을 하게 되고, 1921년 7월 29일 마침내 당내()의 독재적 지위를 가진 당수가 된다.

여기서 나치스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중, 1933년 1월 30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히틀러는 1933년 7월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했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이때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승승장구 하던 독일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져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부터 '사라의 열쇠'까지

(왼쪽부터)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피아니스트, 사라의 열쇠 /영화 스틸컷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작품에서 이전까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사실적인 톤으로 참극의 현장을 생생히 스케치했다. 흑백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초기에는 유대인의 노동력을 이용한 돈벌이에만 관심 있었던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인간애에 눈뜨고, 유대인들을 구해내려 애쓰는 과정을 다뤘다. 리암 니슨이 쉰들러 역을 맡았다.

이 밖에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1997)', 마크 허만 감독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질스 파겟-브레너 감독의 '사라의 열쇠(Sarah's Key, 2010)' 등 많은 영화가 그 때의 참상을 다뤘다.

환갑에야 눈뜬 영화 인생… 아직 난 청춘
비극 이겨내는 사랑과 웃음의 힘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는 있다

도서


아이들에겐 히틀러도, 철조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 내용 참고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리처드 카벤디쉬 외
쇼아 기념관 (Mémorial de la Shoah)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박성욱(pk04****)
2017.01.2606:48:49신고 | 삭제
과거에 아우슈비츠가 있었다면 현제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민간인들에게 백린탄을 터트리고 구호단체의 선박을 피격하여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현대의 게토에서 그들을 몰살시키고 있습니다
장주석(ul****)
2017.01.2601: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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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식(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