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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깨달은 것들

Marine Kim 2021. 5. 30. 22:11

오피니언

[ESSAY] 돈으로 깨달은 것들

딸이 건넨 봉투에 “네가 무슨 돈을…” 하시던 어머니 함박웃음에
‘행복도 돈이 드네’ 웃던 짠순이 딸, 지인에 돈 빌려줬다 속앓이
청포도·치킨 못 산 장바구니엔 푸성귀… 인생 진리도 돈에 깨닫네

이주윤 작가

입력 2021.05.25 03:00

 

 

 

 

돈이 좋다. 돈이 있으면 맨밥에 김치 올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요즘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고, 친구가 비싼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밥값은 누가 내나 절절맬 필요 없이 화끈하게 한턱 낼 수도 있다. 혹자는 제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행복까지 살 수 없는 노릇이라 외치기도 하지만 아니, 나는 분명 보았다. 오래간만에 집에 내려간 딸내미를 시큰둥하게 대하다가도 흰 봉투를 건네받자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내 어머니의 얼굴을. “아유, 네까짓 게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줘, 주기는!” 하면서도 봉투를 어루만지며 액수를 가늠해 보시던 내 어머니의 손끝을. 봉투가 두둑하면 두둑할수록 어머니의 미소 또한 환해지는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그 잘난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길 수밖에. 이러한 까닭으로 돈을 좋아한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애가 다 탄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쓰면 당연히 없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통장에 차곡차곡 넣어두고는 이따금 눈으로 더듬기만 한다. 이상, 짠순이라는 소리를 길게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그렇게 하루하루 짜디짜게 살아가던 어느 날,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다름 아닌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청하는 액수는 나의 한 달 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돈을 빌려주면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오기는 했지만 두말 않고 계좌번호를 물었다. 언제 돌려 달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갚을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예외란 없었다. 그 뒤로 펼쳐진 상황은 늘어놔 봤자 입만 아프니 생략하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 돈 갚을 생각은 않고 자기 할 건 다 하고 다녀서 돈 빌려준 사람 복장 뒤집어 놓는 그 뻔한 얘기 말이다. 처음에는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저럴 돈이 있으면 내 돈부터 갚아야 되는 거 아니야? 끓던 속이 차차 가라앉으면서는 그 사람이 염려스러웠다. 혹시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어서 돈이라도 펑펑 써대면서 시름을 달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이 씨, 다음 달 카드값 어떻게 내지?

마트에 가면 장바구니에 청포도부터 담곤 했었는데, 먹으면 좋지만 안 먹어도 그만인 청포도를 사는 일이 나의 유일한 사치였는데, 한 푼이 아쉬우니 그 앞을 그냥 지나친다. 안 그래도 짜게 사는 인생, 청포도 한 송이만큼의 달콤함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섧다. 빈 장바구니를 팔에다 끼우고 마트 안을 휘적휘적 걸으며, 돈을 빌려 가는 사람은 많은데 갚는 사람이 드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고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만 깊어진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라고 무어 특별한 사람이 아니므로 나 역시 언젠가 그 뻔뻔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다짐해 본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노라고. 멀리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콧구멍이 분당 백이십 회의 속도로 벌름거림을 느끼며 장바구니에다 푸성귀를 담는다. 현대판 자린고비가 따로 없구먼. 내가 이다지도 궁상떨고 있다는 걸 그이는 알까? 허허 쓴웃음이 났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불우 이웃에게 기부한 셈치고 시원하게 잊으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돈 얘기를 꺼내 왔다. 잠자코 기다리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쓸데없이 끌탕을 하며 저이를 원망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이어졌다. 꼭 같은 금액을 한 번만 더 빌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지만 사정사정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간절한지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저번에 빌려 갔던 돈까지 합쳐 이때까지는 꼭 갚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나에게 “응응, 고마워” 하며 멋쩍은 웃음을 웃는 그였다. 약속한 날로부터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 깜깜무소식일까 싶었는데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쁘신 모양이었다. 돈을 빌려주면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다는 이야기가 또다시 떠올랐다. 전에는 그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더니만 이제야 뼛속 깊이 새겨진다. 인생의 진리도 돈을 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역시 돈이 좋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