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뽑아 세우신 바오로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또 비티니아로 가는 것을 왜 성령께서 막으셨을까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일을 시작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분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아 길이 막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고 주님께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분을 붙잡고 흔들며 매달리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깨닫곤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매우 평온합니다. 성령께서 한쪽 길을 막으시면 성령의 지시를 다시 받아들여 또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지혜가 바오로 사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지도 않은 마케도니아에서 하느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고 확신하게 되자 곧바로 그곳으로 떠날 방도를 찾습니다. 길이 닫히는 데에 동요하거나 구애받지 않고 또 뜻밖의 길이 열리는 데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바오로 사도의 이 자유로움은, 모든 것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요한 복음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진리와 거짓,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데, 이 선택의 기로에서 어정쩡한 중간 지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이 저술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우선 반대하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명 다르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험을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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