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58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9, 20]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9] 운도 척척···미군 친구가 병참 책임자 소개 '소개장에…텔렉스에…' 이중삼중 안전장치 군경력 많았던 조상무 인맥 월남사업 큰 도움 1965년에 조중훈 회장과 함께 조중건 상무(전 부회장)가 펜타곤에서 들은 정보는 베트콩을 싹쓸이하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1971년 청룡부대가 월남 파병 행사를 갖고 있다. 월남 참전은 한국 경제 발전의 전기가 됐다. 월남을 제대로 치겠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미군이 승리할 때까지 탄약을 비롯해 전쟁물자를 무한정 지원한다는 뜻이니 한진에는 넉넉한 일감이 있다는 암시였다. 사실이 그랬다. 파월 한국군이 68년 12월 28일 발표한 종합 전적만 해도 2년 동안 사살이 2만1000명이 넘는다고 했을 정도니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7, 18]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7] '한국 장병들이 김치 먹게 해달라' 박정희, '김치도 외화벌이 자원' 인식 '통조림 야전식량' 개발후 존슨에 친서 월남전 당시 한 전투 진지. 월남 참전은 한국경제가 변화의 시기를 맞는 계기가 됐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5, 16]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5] '한국에 큰 경제적 이익 주겠다' 파병요청 서울 온 험프리 부통령 약속 한국 전투부대 독자 작적권 문제 비상 66년부터 한국군의 파병은 무섭게 증가했다. 어찌 보면 미군의 대리전처럼 비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군 증파에 대해서는 존슨 미 대통령이 감사할 정도로 급속히 이루어졌고 숫자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71년에 발간된 존슨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65년 여름 그 당시 15개 미 전투사단 7만5000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미 국방장관)는 34개 사단 증원을 건의해 왔다. 만약 한국이 7개 사단 파병을 해 주지 않았다면 미국 병력 수준은 17만5000명 내지 20만 명으로 늘었을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회..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14]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최빈국 한국 '전쟁통해 경제재건 실탄' 당시 한국 GNP 60불 '북한에도 크게 뒤져' 전투부대 파병 협상전략 차지철 '반대 쇼'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소장. 맨 우측이 육군대위 차지철. 당시 한국은 GNP가 60불 수준으로 북한에 경제적으로 10년이상 뒤져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린다. 건국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가의 논란처럼 건국 60주년의 실질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건..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1, 12]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1] 조중훈 회장 '펜타곤 직접 가 계약땄지' 50년대 수송 하며 사귄 미군 장교들 큰 도움 "한국군 파병하니 용역달라" 하니 단숨에 OK 한국군 참전 초기인 1966년 4월 22일 퀴논항에 도착하는 맹호 26연대 부대원들. 60년대의 한국-. 그것을 극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저울대는 없다. 그러나 단적으로 무게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다. 65년 10월부터 본격화되는 청룡과 맹호의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면서 마땅한 세계 수출시장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그나마 믿는 시장은 월남이었고 66년 국가의 수출 총 목표액으로 잡은 것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목표액을 달성해보려고 정부는 강력한 '수출진흥정책'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2억5000..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9, 10]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9] '돈벌러 가자' 월남으로 월남으로 당시 군수품 수송업체 한진 길열어 '님은 먼 곳에' LP판 현지에서 불티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진은 폐허로 변해 가는 전장에서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금광을 캐면서 대그룹으로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사주팔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진은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또는 의정부나 동두천으로 미군 군수품을 수송하는 업체였다. 그러나 민간 기업으로서 월남전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아무리 선두업체였다 해도 일반 무역회사나 수송업체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월남전과 참전 한국군이 한진에는 은인인 셈이다. 편의상 오늘날의 한진그룹을 '한진'이라 칭하고 있지만 ..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7, 8]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7] '각서 안 쓰면 또 워싱턴 갈 거요' 존슨 대통령과 담판 끝에 '브라운 각서' 작성 상당한 실리 얻어내 한국 경제발전의 디딤돌 월남전에 한국군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 1966년 방한한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한국군이 건설한 월남의 비둘기교. 이동원 장관과 존슨 대통령 간에 오간 두 시간의 대화는 한국군 파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담길 내용도 백악관에서 타결된 셈이며 한국 정부가 계산한 경제적 실리도 사실상 큰 줄기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 것이다. 6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경제사에서 분명한 획을 긋고 있는 국군 파월 내용은 89년 2월부터 집중 인터뷰 여섯 차례 수시 인터뷰..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5,6|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5] '1개 사단 파병에 최소 20억불 내라' '봉급과 전투수당은 미군과 같아야' 이동원장관, 브라운대사 전령 취급 1965년 이동원 외무장관(왼쪽)이 존슨 미 대통령을 만나 3월 한국군 파병에 따른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갈수록 월남전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마치 블랙홀처럼 끝없이 빨려들 듯 확전되고 배면기지 역할을 하는 태국의 미군기지 공사는 시각을 다투며 각국의 건설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베트남 전쟁은 관련국들을 숨가쁘게 했고 전황은 미군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동원 장관은 전장에서 소요되는 한국군의 물자는 한국산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한국군의 현대화 안건 등을 놓고 브라운 대사를 이른바 '전령'으로 내세운 외교적 줄다리기..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3, 4]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3] '미국에 큰소리 친 적 있습니까?' 이동원 외무 '미군 철수 운운은 공갈' '실리 최대한 얻어야' 박대통령 설득 월남파병의 주무부서는 당연히 국방부였다. 그러나 해외파병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특히 한국과 혈맹관계인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파병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실리라는 최소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국방장관이 아닌 국무장관이 나섰듯이 한국의 핵심 파트너는 외무장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동원 장관이 생전에 필자와 만났을 때 털어놓았던 회고담이지만 그는 파병을 앞두고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담길 핵심적인 실리를 얻어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 앉아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언급..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 2 ]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 2] 최빈국 한국 '전쟁통해 경제재건 실탄' 당시 한국 GNP 60불 '북한에도 크게 뒤져' 전투부대 파병 협상전략 차지철 '반대 쇼' ​박정희는 1964년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월남전에 파병한다. 그리고 56년이 흘렀다.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파병으로 한국 경제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소장. 맨 우측이 육군대위 차지철. 당시 한국은 GNP가 60불 수준으로 북한에 경제적으로 10년이상 뒤져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

해병정신 2021.01.09